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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수 Apr 25. 2016

나는 우울증을 겪고 있습니다

자기혐오와 절망을 상대로 한 쉽지 않은 싸움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은 주인공 산드라(마리옹 꼬띠아르)가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수화기를 붙잡고 통화하던 그녀는 별안간 주체하지 못할 감정에 휩싸입니다. 울먹이면서 참아보려고 애쓰지만 결국은 고였던 눈물이 왈칵 쏟아집니다. 그리고는 약을 찾아서 입에 털어 넣고 삼키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많은 사람에게 이 영화는 '복직을 위한 노동자의 노력'이 담긴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실제로 휴직 이후 다시 직장에 복귀하려는 산드라의 모습과 그를 도우려는 동료의 노력, 산드라를 재고용하지 않으면 자신의 보너스가 늘어난다는 이유로 복직에 반대하는 사람들까지 영화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사측과 노동자의 갈등, 돈과 연대 사이의 선택'을 적절히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산드라 개인의 이야기에 더 집중해보면 '우울증의 극복'에 관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애초에 산드라가 휴직해야만 했던 이유가 극심한 우울증이었기 때문이죠. 첫 장면 역시 우울증을 겪는 그녀의 모습을 압축해서 보여줍니다. 또한 줄거리가 진행되는 내내 이런 상황은 반복됩니다. 영화가 관객에게 보여주는 산드라의 이틀은 '내 일(my job)을 위한 시간'이면서, 자신을 추스르려 애쓰는 '내일(tomorrow)을 위한 싸움'인 셈입니다.


겪지 않았더라면 이해하지 못했을 장면


첫장면부터 다가오는 느낌이 꽤 달랐습니다. 산드라가 울음을 터뜨리고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는 장면을 아마 지난해에 봤더라면 '이상한 모습' 정도로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영화를 보면서 그게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겪지 않았더라면 이해하지 못했을 법한 장면이 묵직하게 와 닿았던 이유는, 내가 우울증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난 1월부터 정신과에서 치료와 상담을 받고 있습니다. <내일을 위한 시간>은 정신과 선생님이 권해준 덕분에 보게 된 영화입니다. 개봉 당시에 극장을 찾으려다가, 기억하지 못할 이유로 상영 시기를 지나쳤고 최근에서야 찾아서 봤습니다.


사실 어느 정도의 우울은 10대 때부터 줄곧 이어졌고, 스스로 이를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고1 때 학교에서 진행한 성격검사에서 대부분의 친구들이 3~5%, 기껏해야 15% 내외를 기록한 '우울' 성향에서 제가 95%를 기록한 결과도 기억합니다. 저를 포함해서 교내에서 딱 2명이 90%대를 기록했는데, 다른 한 명은 그해가 지나가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 애가 죽고 나서 나온 결과지가 책상 위에 놓이고, 거기서 '우울 성향 99%'가 적힌 부분을 본 기억도 떠오르네요.


군에 다녀오고 해외에서 2년간 지내면서 어느 정도 성격이 활발한 쪽으로 변했고, 사람들과 지내기에 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조용하고 침울했던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다기보다, 그런 성격을 가진 나를 스스로 덜 미워하고 '내가 이런 인간이다'라는 걸 받아들인 것에 가까웠죠. 사람들 앞에서 우울한 모습을 덜 드러내고, 혼자 생각과 감정을 정리하는 법을 알게 된 정도였습니다.


우울증을 겪는 이유야 다르더라도 <내일을 위한 시간>을 보면서 조금은 위안을 얻었습니다. 단지 영화일 뿐이지만, 이런 방식으로라도 내가 겪는 것과 닮은 타인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반가울 정도였죠. 이런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건, 적어도 누군가는 이런 상태를 이해하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요.


'시야가 좁아진 상태'와 '깊이 가라앉는 기분'


문득 '병원에 가야 한다'고 생각한 건, 어느 날 극장에서 겪은 일 때문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취향에 맞는 영화를 보고, 엔딩 후 자막이 올라가는 스크린을 보고 흐뭇하게 웃던 순간에 이상한 증상이 찾아왔죠. 평온하던 순간이었는데 갑자기 숨을 쉴 수 없었습니다. 혼자 찾았던 극장에서 고개를 숙이고 숨을 뱉어보려고 온 힘을 쥐어짜 내던 몇 분간 극도의 공포와 불안을 느꼈습니다.


이상한 증상은 이후에도 이어졌습니다. 18층 사무실에 앉아있으면 갑자기 발 밑의 공간이 '쑥' 꺼지고 추락할 것 같기도 했고, 멀쩡한 건물이 크게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습니다. 이런 느낌이 심해질 땐 아무도 모르게 1층에 내려가서 숨을 고르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는 일마저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렇게라도 진정시키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이런 것들이 '불안 장애'로 인한 증상이라고 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약을 복용하면서 심한 불안은 사라졌습니다. 다만 동시에 찾아온 우울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죠. 늘 발을 진창에 담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은 어느 순간에 다시 찾아왔고, 약을 먹는 동안에 잠시 잠겨있던 몸을 뭍으로 건져놓은 듯했습니다.


우울할 때의 감정을 글로 세밀하게 묘사하기는 쉽지 않은데, 흔히 쓰는 표현처럼 '깊이 물속으로 가라앉는' 기분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저 수면밖에 있는데, 어느 순간에 나는 헤엄치지도 못하며 굳은 몸으로 어두운 물속에 빠져드는 것 같다고 할까요. 홀로 고립된 느낌이죠. (관련 글 : 허핑턴포스트 코리아, '우울을 간단한 일러스트레이션으로 표현하다')


그럴수록 사소한 일에 무겁게 짓눌려서 허우적대는 나를 미워하게 됩니다. 자기혐오는 나쁜 버릇과도 같아서, 나를 미워할 만한 이유를 한 번 발견한 이후에는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비슷한 상황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악순환은 극단적인 결론으로 쉽게 연결되고, 결국 이걸 끊으려면 내가 스스로 삶을 끝내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으로 보이게 됩니다.


정신과 선생님은 그 이유를 두고 "우울증이란 게 '시야가 좁아진 상태'와 같다"고 설명하더군요. 일반적인 경우 길('삶'을 '길'이라고 묘사했을 때)을 걷다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돌아서 다른 길을 찾는데, 우울증을 겪는 사람은 시야가 좁아져서 그 막다른 길 앞에서 주저앉게 된다는 겁니다. '여기가 끝이야, 난 이제 끝났어' 하고 말이죠.


겪어보지 않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뒤를 돌아보면 되잖아?'라고 쉽게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상황에 있던 경험으로 말하자면 그건 '단순히 고개를 돌리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을 잃은 사람에게는 '차라리 삶을 끝내는 것이 낫지 않을까'라는 물음이 머릿속에 자리 잡게 되는데, 시간이 지나서 그게 뿌리를 내릴수록 확신으로 굳어집니다. 나중엔 고개를 돌릴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데, 어느 정도 이상 단단하게 굳은 '확신'이란 걸 이겨내는 일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습니다. '노력'만으로 가능하지도 않고요.


자기혐오와 절망과의 싸움, 여전히 '현재 진행형'


이젠 간신히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정도는 된 것 같습니다. 내가 나의 상태를 글로 적을 수 있는 정도는 되었으니까요. 처음 정신과를 찾았던 순간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바스러진 멘탈 파편을 추슬러서 품에 안고 갔다가 병원에서 와르르 쏟아낸 기분이었어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일과 생각을 토하듯 고백하면서 울었는데, 일단 그것부터 상당히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자기혐오와 절망과의 싸움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제게는 그렇습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우연히 점심 약을 걸렀던 지난주엔 다시 감정의 밑바닥까지 끌려내려 가서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기억과 생각들 사이에서 뒹굴면서 괴로웠습니다. 그 이후에는 알람을 맞춰놓고 하루 3번 약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매주 상담을 받으면서 한 주를 돌아보고, 내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선생님에게 털어놓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내가 그때 왜 그런 감정이었는지, 왜 이런 기분을 느꼈는지 돌이키게 됩니다. 이런 일이 마음을 정리하는 데 꽤 도움이 된다고 느끼면서, '지금껏 살면서 이런 일을 하지 않았구나' 하고도 깨닫습니다.


1월 이후에는 인간관계와 생활패턴을 극한으로 단순화했습니다. 하루는 '일-식사-운동-잠'으로 진행되고, 업무나 서비스 이용을 위한 것 이외에 사적인 만남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지인과의 약속도 기약 없이 미루고 있습니다. 기본적 삶을 위한 필수적 요소를 제외하곤 모두 털어낸 셈인데, 돌아보면 삶의 무게와 부담감을 줄이려고 발버둥 치는 와중에 이렇게 됐습니다. 좁은 울타리지만 스스로 쳐놓은 것이고, 상태가 더 나아졌다고 느끼기 전까지는 이를 넘어 바깥으로 나아갈 생각은 아직 없습니다.


남은 삶과 하루를 위한 기대감을 최소로 줄여놓고 지내는 나날입니다. 나를 바닥으로 끌어당기던 자괴감과 자기혐오는, 어쩌면 스스로에 대한 기대에 못 미치는 내 모습으로 인한 결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내가 산드라가 그랬던 것처럼 '내일을 위한 시간'을 다시 찾을 수 있을지도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나는 자신을 향한 어떤 신뢰를 잃었는데, 나에 대한 믿음이 복구되기 전까지는 인간관계와 삶의 영역을 다시 늘려놓지 않을 계획입니다. 지금 확실한 건 단지 그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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