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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수 Apr 02. 2020

'n번방 사건'과 혐오... 이 책이 있어 다행이다

[서평] 손희정 페미니스트 평론가의 책 '다시, 쓰는, 세계'

최근 ‘N번방 성착취 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고 있다. 텔레그램 메신저에서 성범죄를 통해 제작된 불법 촬영물이 유포되었고, 온라인 단체 대화방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거액의 돈을 지불하고 해당 영상을 공유한 것이 사건의 주요 내용이다.


그런데, N번방 성착취 사건을 두고 난데없이 갑자기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얘기도 나온다. 사건이 벌어진 무대가 새로운 온라인 메신저일 뿐, 지난 수년간 한국 사회에 만연했던 여성 대상화와 강간문화(“강간이 만연한 환경, 미디어와 대중문화가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규범화하고 용인하는 환경” - 레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중에서)가 또 다른 디지털 성범죄를 낳았다는 것이다.


지난 몇 년간 ‘페미니즘 리부트’라 표현될 정도로 젠더 이슈를 보는 사람들의 인식이 변하고 있다. 성범죄뿐만 아니라 성차별, 성별에 대한 편견을 고발하고 지적하는 흐름도 그동안 꾸준히 이어졌다. ‘나도 고발한다’는 의미를 담은 미투 운동도 각계에서 계속되고 있다.


이런 흐름을 모아 담아낸 책이 최근 출간됐다. 바로 페미니스트 비평가 손희정의 책 <다시, 쓰는, 세계>다.


2016년부터 페미니즘으로 ‘다시, 쓰는, 세계’


<다시, 쓰는, 세계>는 저자 손희정이 2016년부터 쓴 칼럼들을 엮은 책이다. 과거에 쓰인 그의 글들을 다시 읽자면, 한국에서 지난 4~5년 동안 벌어진 사건들을 페미니즘으로 다시 보는 느낌이다. 책의 제목 그대로 말이다.


본문 첫 부분에 실린 글에서는 1999년 개설된 한국 최대 규모의 음란물 공유 사이트 ‘소라넷’, 거기서 2016년 벌어졌던 디지털 성폭력을 다룬다. 100만 회원을 두었던 사이트에서 불법 촬영물이 공유되고 여성을 상대로 한 성범죄가 영웅시되곤 했다는 걸 돌아보면, 2020년의 ‘N번방 성착취 범죄’가 떠오른다. 특히 해당 칼럼 마지막에 담긴 저자의 지적은, 수많은 남성들이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가담한 두 사건의 핵심을 찌른다.


“괴물은 침묵을 먹고 자란다. 그러므로 이제 남성들의 차례다. “소라넷은 소수만의 문제이며, 남성 전체의 문제라고 말하는 건 일반화의 오류일 뿐이다”라고 물러나 있을 것이 아니라 괴물을 키우는 ‘침묵과 암묵적 동조’라는 일상을 바꿔야 한다. 그리고 이 지겹도록 반복되는 폭력의 역사를 함께 끝내자.” - 본문 22쪽 중에서


이어 책에서는 2016년 강남역 여성살인 사건을 비롯해 문화계와 사회 전반에서 발견되는 성차별적 사안들이 거론된다. 그리고 가부장제, 강간문화와 싸우기 시작한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도 더해진다.


“예전에는 많은 여성들이 이런 사건을 보면서 “몸가짐을 단정히 하라”는 가부장제의 명령을 내면화했다. 그리고 남자들은 “보호해줄게”라며 여성들에게 호루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넘어가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여성들이 밖으로 나와 여성을 죽이는 문화를 바꾸자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보호가 아닌 보호받을 필요가 없는 안전한 세상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기존 사회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꽤 낯설고, 또 불편한 광경일 터다.” - 본문 135~136쪽 중에서


혐오, 그리고 ‘정상성’에 대한 고민


본문에서는 예능판과 영화, 정치 등 남성 위주로 돌아가는 분야들을 짚으며 이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더한다. 예를 들면, 재난 상황에서 국민에 지급되는 응급구호세트에 남성용 면도기는 포함되지만 생리대는 “활용도가 낮다”는 이유로 제외된 걸 언급하며 “한국 정부가 판단하는 ‘활용도’의 기준이 남성임을 보여준다”라고 꼬집었다.


“남자에 대해서 생각할 때가 왔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남자는 인간으로, 여자는 그 인간에 대한 결핍이자 타자로 여겨왔다. 이제 우리는 ‘보편인간’으로 상상된 남자가 아니라, 성별을 가진 존재, 즉 성화된 존재로서의 남자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말해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적인 폭력과 차별은 남자만을 보편적인 인간으로 다뤄온 사유의 한계 속에서 등장한다.” - 본문 69쪽 중에서


비장애인 이성애자 시스젠더 남성이 '정상'이자 사회의 '표준'으로 여겨지는 분위기가 한국에서 여성혐오 등 다양한 편견의 뿌리가 됐다는 걸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다.


이어 저자는 "남자들에게 페미니즘이 무슨 소용인가?"라고 물으며 이에 대한 답을 적었다. "역차별이 아니다. 당신은 기득권 남성들로부터 이미 성차별을 당해왔다"며 저자는 '남성연대'에서 소외된 남성들 역시 페미니즘을 통해 착취와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페미니즘과 다른 소수자 문제의 만남


앞서 '남성' 정상이자 표준으로 보는 생각이 편견을 만들고, 이에 맞서는 것이 페미니즘이라는 내용을 소개했다.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성범죄, 각 분야에서 여성이 채용과 업무 중 차별받는 사건 등이 최근 뉴스 기사로 자주 거론된다. 지난 몇 년간 페미니즘이 크게 주목받고 있는 배경은 누군가 '남녀 갈등'을 부각하기 때문이라기보다, 현실의 문제로 인해 여성들이 분노하며 해결책을 찾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손희정 평론가의 책에 실린 가장 최근의 사건으로는, 2020년 1월 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 때문에 군대에서 강제 전역하게 된 하사의 사례가 실려 있다. 본문에서 저자는 "트랜스젠더 여군의 탄생은 근대 국민국가 만들기를 통해 형성된 남성성과 여성성의 신화를 무너뜨리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라고 적었다.


또한 2018년 한국을 떠들썩하게 흔들었던 예멘 난민 사태를 두고는, <한겨레>의 '가짜뉴스의 뿌리를 찾아서' 기획 기사를 언급하기도 했다. 실제로 예멘 난민에 대한 소문이 퍼진 것들 중 대부분은 공포를 자극하는 가짜뉴스로 밝혀진 바 있다.


저자는 "'여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동력을 다른 소수자에 대한 혐오로부터 끌어오기로 마음먹기는 쉽고, 그만큼 유혹적이다"라고 적으면서 "우리의 운동이 좀 더 위대해지기를 바란다"라고 덧붙였다. 페미니즘이 남성을 '정상'으로 여기는 편견에 대항하는 것인 만큼, 난민과 성소수자를 '비정상'인 듯이 여기는 것에도 반대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낯선 대상을 상대할 때 혐오와 차별이 가장 쉬운 해결책처럼 여기저기서 고개를 드는 2020년, 페미니즘과 다른 소수자 문제의 만남을 보여주는 책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성혐오, 성소수자 혐오, 난민 차별이 빈번한 요즘, "페미니즘은 "나는 당신들과 다르다"라고 말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우리'를 발견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은 큰 울림을 준다. 


손희정 평론가의 책 <다시, 쓰는, 세계>에 지난 4년간 페미니즘이 다시 쓴 세계가 담겼듯이, 앞으로 맞이할 시간들도 차별과 혐오가 줄어든 세계로 다시 쓰일 수 있길 바란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 기사로도 발행됐습니다. http://omn.kr/1n2s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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