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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단짝, 그 진득함에 대하여

by 선물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가까워지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다.

아이들도 그렇다.

8살 아이들에게도 죽고 못 사는 단짝이 생긴다. 특히 여자아이들이 그렇다.

오늘은 그 단짝 중에서도 유독 진득한, 영혼의 단짝을 만든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왜 ‘진득한’이란 단어를 쓰냐 하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선생님, 물 따르러 가도 돼요?”

“다녀 와.”

“저도요!”

“그래.”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다.


“선생님, 화장실 가도 돼요?”

“다녀 와.”

“저도요!”

“그래.”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다.

이것이 하루에 3~4번 정도 반복되다 보면 싫어도 눈치를 챌 수밖에 없다.

얘네 놀러 갔구나.


물론 쉬는 시간이라면 문제 될 것이 없다. 문제는 수업 시간이다.

수업 시간에 이 둘을 짝으로 하면 이 아이들은 수업을 듣지 않는다. 나의 새로 산 마이크를 걸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떨어뜨려 앉혀야 하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단짝인 아이들은 함께 있고 싶다. 하지만 수업 시간엔 떨어져 앉는다. 그러면 수업 시간에도 같이 있으려면?


“선생님, 화장실 가도 돼요?”

“저도요!”


이렇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이럴 땐 교사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공권력을 휘둘러 엄정한 벌을 내린다.


“수업 시간에는 1명씩만 화장실에 갈 수 있어요. 한 명이 먼저 가고, 다른 사람은 나중에 가요.”


없던 규칙을 만드는 것이다.

아이들은 처음에 굉장히 당황한다. 하지만 곧 적응한다. 적응해서, 진화된 수를 쓴다.


“선생님, 화장실 가도 돼요?”

“네, 다녀와요.”

“저도요.”

“안 돼요. 1명씩만 갈 수 있어요.”

“저 엄청 급해요! 쌀 것 같아요!”


이 상황에서 교사는 패배할 수밖에 없다. 만에 하나 진짜로 당장 쌀만큼 급할 수도 있으니까.

눈물을 삼키고 화장실을 보낸다. 패배했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힘은 여기까지임을 인정한다.

아이들이 모두 하교한 오후, 패배한 교사는 전화기를 든다.


“안녕하세요, 단짝이 어머니시죠?”


다음날, 단짝이들은 풀이 죽어 등교한다.




단짝을 만드는 일이 좋은 점만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어떻게든 붙어있으려는 아이들을 보면 “그래, 원껏 놀아라! 얼마나 좋으면 그러겠니! 그렇게 좋아하는 친구를 만난 것도 네 복이고, 평생의 기쁨이다!”라고 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교사가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놀라고 할 수는 없기에, 요리조리 어설픈 솜씨로 교사의 감시를 피하려는 아이들을 눈 뜬 장님처럼 이따금 모른 척해줄 뿐이다.

“얘들아, 선생님 눈엔 다 보인다.”


*본 글에 나오는 일화, 인물, 단체, 지역은 각색과 재구성을 거친 것으로 특정 일화나 특정인을 지칭하고 있지 않습니다.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도 모두 가명임을 밝힙니다. 가벼운 소설이라 생각하시고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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