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그랬다. 내가 그 사람을 붙잡았던 건, 사랑이 아니라 내 생존 때문이었다고. 그를 놓는 순간, 나는 더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았고,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래서 그를 붙잡았다고,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 글을 써 내려가며 그와의 시간을 하나하나 꺼내보는 동안, 나는 알게 되었다. 나의 생존이었던 그 사람이, 동시에 나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그가 조용히 건네던 위로, 함께 울고 웃던 나날들. 그 모든 순간은 너무도 크고, 따뜻하고, 진심이었기에 생존 때문이었다고 하기엔, 가슴 저리게 뜨겁고, 평생 잊을 수 없는 사랑이었다는 걸. 결국, 나는 그를 너무도 사랑하고 있었다. 생존은 내 안에 있던 또 다른 이름이었을 뿐.
이 글을 쓰는 동안, 그를 향한 수많은 기억과 감정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글을 쓰다 말고 한참을 울기도 했고, 어느 순간엔 그리운 장면들이 떠올라 웃기도 했다.
그렇게 허공을 떠돌던, 말로 꺼내지 못한 감정들과 상처들이 조금씩 종이에 내려앉기 시작했고, 그렇게 천천히, 그에 대한 마음을 정리해 가는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되었다. 예전엔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그의 이름만 들어도 눈물부터 고이던 내가 이제는 담담하게, 아프지 않게 그와의 기억을 꺼내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홀로 남겨진 주인공이 끝없는 바다를 표류하던 어느 날, 태풍이 몰아치기 전, 거대한 고래를 만난다. 그저 조용히 바라보며, 지켜주는 존재. 소중했던 윌슨마저 떠나보낸 후 그는 절망 속에서 온몸을 내던진 채 바다 위에 떠 있었고, 고래는 그 옆을 묵묵히 맴돌며 함께 해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멀리서 큰 배가 다가올 때, 고래는 주인공에게 커다란 물기둥을 뿜어 그에게 구원이 다가오고 있음을 조용히 알려주었다.
그는 나에게 그런 고래 같은 사람이었다. 내가 끝없이 무너지고, 삶에 지쳐 가만히 가라앉을 때. 내 곁에서 조용히, 묵묵히 나를 지켜봐 준 사람. 말없이, 판단 없이, 그냥 함께 있어줬던 사람. 내가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순간들을 떠올려보면 언제나 그가 곁에 있었다. 무언가를 크게 하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나를 붙들어주던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을 사랑했고, 그 사람은 그렇게 나의 심해를 같이 헤엄쳐 준, 결코 날 놓지 않았던 사람. 그 사랑이, 그 따뜻함이 끝끝내 나를 살게 했다.
나는 그런 그를 사랑했고, 그 사랑은 분명 나를 살게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사랑 안에서조차 나는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그를 사랑할수록 마음 한편은 점점 더 아파왔다. 괜찮지 않았지만 괜찮은 척해야 했고, 속은 타들어가는데도 겉으론 웃어야만 했다. 다시는 그에게 상처 주면 안 된다는 조급함이 나를 침묵하게 만들었고, 힘들다는 말조차 삼키며 애써 괜찮은 얼굴을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나라는 사람이 조금씩 사라져 갔다. 같이 있는데도 외로웠고, 그 사랑 안에서 나는 자꾸만 아팠다. 우리는 분명 사랑하고 있었지만, 그만큼 상처 또한 깊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별을 해야 했다. 나를 위해. 그리고 그를 위해.
그렇게 우리의 이야기는 마침표를 찍을 준비가 되었지만, 내 삶은 이제 비로소 나를 위한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고 있었다. 무너질 줄 알았던 이별을 견디고, 그리움에 무릎 꿇을 것 같던 시간도 지나고, 이제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에게로 돌아가는 중이다.
그래서 결심했다. 정말 끝을 맺어야 할 시간이라고.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네 집에 있는 내 물건들, 이제는 가져가야 할 것 같아.” 어떤 답장이 오든 상관없었다. 이젠 그를 떠올려도 울지 않으니. 이젠 웃으며, 잘 지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두렵지 않았다. 그와는 이별하지만, 나와는 이제 시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