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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밤 Sep 23. 2021

120년 된 집 홍수 뒤처리

고단하다. 사는 게.

홍수가 나서 지하실에 물이 찼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무려 1900년에 지어진 목조 주택. 나이가 자그마치 120년도 넘은 집이다.

살다 살다 이젠 120년 먹은 집에서 홍수까지 겪어야 하나......... 싶은 생각에 너무나 울적했지만 울적은 울적이고 뒤처리는 뒤처리. 어른이란 그런 것. 울적은 울적이고 해야 할 건 해야 한다. 나 대신 누가 나서서 정리를 해 줄 것도 아니니 정신을 차리고 집을 치웠다.

지하실에 살짝 물이 찼다가 빠진 단 몇 시간의 사태는 나에게  몇 가지 큰 깨달음을 안겨 주었다.


1. 종이는 잘 썩는다

종이가 이렇게 잘 썩는 물질(?)인 줄 이제야 알았다.

이래서 종이를 친환경 소재, 친환경 소재.. 그러는구나. 아아.. 그랬구나. 이제야 알았네.

물을 머금은 종이 박스들은 고작 하루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 곰팡이가 피고 박스의 위쪽을 붙잡고 어영차 위로 들면 박스 아래쪽이 뿌직 찢어졌다. 박스도 미끌거렸다. 뭔가 미생물의 활동이 시작되었다는 증거였다.

어떻게 되나 가만히 둔다면 금방 썩어서 자연으로 돌아갈 듯싶다.

하지만 지하실에서 썩게 둘 순 없잖나.


2. 중요하고 소중하고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면 지하실엔 보관하지 말자.

올해 초 17번째 이사를 준비할 적에 우리 식구들은 서로 합의했었다.

각자 남기고 싶은 책들은 5박스 이내로만 추려 보자고. 각자 엄선했고 박스에 넣었고 이삿짐 트럭에서 그 박스들을 내리자마자 박스에 넣은 그대로 지하실에 처박아 두었었다.

고르고 골라 추리고 엄선했어도 결국 가는 자리는 지하실.

되돌아보면 우리가 엄선한 책들은 정말로 우리에게 중요한 책들이었을까.

살짝 들어 올리기만 해도 부우욱 찢어지는 책 박스들을 보며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꼼꼼히 살필 용기도

나질 않아서 막무가내로 버렸다.

아이와 관련된 것들만 찬찬히 살펴 건질만한 것들을 건져냈다.

소중한 것이 있다면 내가 밥 먹고 내가 잠자는 높이에 보관하자.


3. 살아가는데 물건이 이렇게 많을 필요는 없다

나는 결단코! 물건을 이고 지고 그것에 짓눌려 사는 사람은 아니다. 나는 잘 버린다. 나는 잘 안 산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왜, 왜, 왜, 나는 이런 일에 휘말려 '물건' 걱정을 해야 하나.




엄밀히 말해서 내가 겪은 '홍수'는 '홍수'의 'ㅎ'자도 꺼낼 수 없는 아주 미미한 것이라는 걸 안다.

찰박찰박 물이 약간 바닥에 깔렸다가 비가 멈추자 빠져나간 그런 정도니까 말이다.

정말 심각한 재해를 당한 사람들은 따로 있고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너무 많다. 마음이 어렵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단체에 내 멀쩡한 물건들을 기부했다. 아이, 아까워라 하는 마음이 드는 물건을

기부한 것은 아니다. 너무 멀쩡한데 나는 사용하지 않고 있는 물건들을 박스에 담고 봉투에 채웠다.

이 멀쩡한 물건들을 필요한 사람들이 가져다가 매일매일 사용하면 좋겠다는 마음뿐이다.

살아도 살아도 겪어야 하는 일의 다양함과 가짓수는 계속 늘어나는 것처럼 느껴지고

물건을 줄이고 정리해도 어디선가 또 새롭게 등장하는 살림살이를 보고 있자니

물건들도 자발적으로 태어나고 자라고 번식하나................... 이런 기괴한 생각까지 든다.

허허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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