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되네
김치 없이 못 살아 정말 못살아! 하!
나는 뭐 이런 사람은 아니다. 아니었다.
토종 순수 혈통 100프로 한국인인 중년 여자로서의 나는 김치와 함께 살아왔고 김치를 좋아하고 김치를 응용한 거의 모든 음식을 즐겨 먹지만 김치 없이 못 사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김치 없이 살 수 없을 줄 알았다. 4개월 동안 한 쪼가리의 김치도 먹지 않았는데 아직도 잘 살아있다.
나는 김치가 없어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4개월은.
나 이외의 다른 식구들도 김치 김치 타령을 하지 않는다. 다들 왜 이러는건가.
분명히 우리는 김치를 좋아하는 사람들인데.
한 끼를 먹는 동안 못해도 적어도 한 번은 젓가락이 가는 반찬. 김치. 뭐랄까 한 번도 안 먹어주면 김치가 서운해할 것 같은. 그런 반찬.
평범한 서울 변두리 어느 골목집. 그런 동네 비슷한 처지의 어느 집을 가도 냉장고에 김치 없는 집은 없을 것이고 딱 꼬집어 김! 치! 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김치가 배추김치라고 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배추김치 말고도 서너 가지 다른 종류의 김치를 저마다 가지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홈쇼핑에서 별의별 김치를 야무지게 구성해서 팔더라만 (3년 전 상황)
깍두기, 파김치, 나박김치, 열무김치(seasonal item), 동치미(역시 시즈널 김치) 등등은 그냥 냉장고를 팍! 열기만 해도 냉장고 아랫칸과 중간 칸에 주르륵 나열된 김치일 것이다. 물론 요즘엔 김치 전용 냉장고가 있어서 그것 없이 사는 집은 거의 없는 듯싶지만 말이다. (나도 김치 냉장고라는 거 한번 써 봤으면. 흑흑)
그냥 그 집에 원래 붙어있던 붙박이 가구 같은 반찬인 것이다. 김치란.
나는 이곳- 한국 마트 주변에 많은 곳- 에서 살면서 배추김치와 깍두기는 비교적 마음만 잘 먹으면 뚝딱! 만들 수 있는 중년 여자가 되었다. 한국에 사는 내 또래의 여자들보다 대용량의 김치와 깍두기를 더 많이 자주 만들고 그것들을 마음껏 지지고 볶고 끓여 먹으며 살아왔다. 조사해보니 한국에 사는 내 또래의 여자들은 김치를 담그지 않더라. 공수받는 곳이 있거나 사 먹는 모양이었다. 부러웠다.
손수 싸고 손수 푸는 원시적인 이사를 18번째 준비하며 나는 모든 영역의 짐을 가볍고 간편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냉장고에 든 음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알뜰하게 먹고 홀가분하게 떠나리라 결심했다. 이사 한 달 전 냉장고에 있던 많은 저장음식, 냉동음식 등을 해치웠다. 김치도 그때 다 떨어졌다.
이사 가면 새 마음, 새 다짐으로 김치를 담글 테다
이사를 마친 지 석 달. 나는 김치를 담그지 않고 있다.
귀찮. 정말 귀찮다. 10년 이상 해오던 일인데 왜 이렇게 하기가 싫은지 모르겠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몸이 으슬으슬한 날 새콤하게 잘 익은 김치를 쫑쫑 썰어 넣고 얇고 바삭한 김치전을 먹고 싶은 생각이 드는 날이 있었다. 지난 4개월 동안.
혀가 델 듯 펄펄 끓는 우동 한 그릇을 앞에 놓고 깍두기 한 접시가 사무쳤던 날도 많았다. 지난 4개월 동안.
동네 사람, 옆 집 사람, 같은 라인에 사는 사람, 같은 층에 사는 사람, 다닥다닥 붙은 이웃 사람들의 눈치를 이젠 하나도 보지 않아도 되는 구조의 집이라 푹푹 팍팍 찌개를 끓여도 괜찮을 것 같은데
정작 내게 김치가 없다.
김치 없이 얼마나 더 오래 버틸 수 있나 실험이라도 한번 해볼까 아니면 당장 이번 주말 배추와 무를 사러 멀고도 먼 한인마트 순례길에 올라야 할까.
아, 맞다. 대통령선거 투표하러 가야된다. 이번 주말.
김치는 그럼 또 기회를 봐서 다음번에.
안녕 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