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걸 왜 가져왔나
이 상자는 어디에 놔?
이삿짐 상자들을 들고 방황하는 식구들에게 나는 무조건 그런 상자들은 지하실에 갖다 놓으라고 말했다.
박스 겉면에 뭐라고 표시하지 않은 박스들은 분명히 이삿날 막판에 어딘가에서 튀어나와 급하게 빈 박스에 쑤셔 넣은 것들 이리라. 나중에 천천히 정리하지 뭐.
그저께 지하실에서 이런 종류의 박스들을 뜯고 정리하다가 이것을 발견했다.
태극기 보관함
나는 정확히 저걸 언제, 어디에서, 왜 샀는지 기억한다. 거의 내 아이의 나이만큼 먹은 태극기.
그런데 저걸 여기까지 가지고 왔던 것은 기억하지 못하겠다. 여기서는 단 한 번도 펼쳐보지 않았기에 존재조차 잊었던 태극기 보관함.
살며시 열어 보았다. 어라? 국기봉이 없다. 동그란 황금색 봉오리 장식만 있고 국기봉이 없다. 이럴 수가.
십몇 년을 꽁꽁 돌돌 감겨있던 태극기도 바닥에 한번 펼쳐 봤다. 살살 잘 펼쳤다.
다행히 태극기는 아주 말짱했다.
우리 집에 이게 있어!라고 알려주려 사진을 찍어 식구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그래서 사진을 찍으려는데
셀폰 화면으로 보이는 태극기를 보자마자 눈물이 났다. 어머. 나 왜 이러냐. 난 이런 사람 아닌데.
요즘 하도 대선, 투표, 나라 걱정, 우크라이나 걱정, 지구 걱정을 해서 그런가.
이삿짐에서 나온 태극기를 보고 지하실에서 눈물이 나는 날이 올 줄이야.
메시지로 사진을 받은 남편이 '왠지 찡하다' 고 답했다.
그도 같은 마음이었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