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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밤 Dec 06. 2018

잡으면 먹고 못 잡으면 굶지

많이 잡아와 줘

남편이 손수 먹을거리를 사서 귀가하기 시작한 지 두 달이 넘어가고 있다.

그의 평생에 처음인 경험. 혼자 장보기. 아픈 마누라 봉양하기.

처음엔 당황하는 듯싶었으나 요즘은 즐기는 것 같을 때도 있다. 특히 오늘처럼 이렇게 말할 때 보면.


ㅇㅇ아 내가 맛있는 거 많이 잡아왔어, 이것 봐. 많이 잡아왔지?



허무맹랑하고 무익한 것들을 상상하기 좋아하는 나는 이런 생각을 자주 해봤다.

내가 만약 3천 년 전쯤 어디선가 살고 있는, 지금과 똑같은 가족 구성원(남편 1, 아들 1)을 거느린 채 살아가는

여자라면 내 남편이 사냥꾼인 것이 좋을까 아니면 어부인 것이 더 좋을까.

삼겹살과 갈비를 포기할 수 없고 고등어구이나 오징어 볶음도 동시에 포기가 안될 땐 바다와 산을 아우르는 그런 옵션은 없을까 그런 환상의 장소는 없을까 하면서 혼자 괴로워하기도 한다.

사냥과 낚시를 같이 할 수 있는 남편이라면 더더욱 좋겠군!
산을 중심으로 바다가 둘러싼 섬이 좋겠어!


이런 기발한 생각을 하면서 무릎을 탁 칠 때도 있다.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는 나도 모름. 그냥. 재밌잖나.




알래스카. 러시안 리버(Russian River). 연어 낚시의 천국 of 천국.

이곳에서 만난 어느 60대 초반 미국 아줌마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이 강을 따라 끝도 없이 줄줄이 서서 낚시를 하는 전 세계에서 모여든 연어낚시 미치광이들을 사진 찍던 중이었다.

줄줄이. 옆으로 나란히. 수백, 수천미터 줄줄이. 연어의 씨를 말릴 작정인가 (사진출처:구글맵)


그러다가 만난 60대 미국 아주머니. 은퇴한 남편과 아주 허름한 RV를 끌고 알래스카로 올라와 2달째 살고 있다고 했다. 여름엔 알래스카로 와서 지내고 겨울엔 플로리다에서 지낸단다. What a LIFE!!!

81시간. 생각보다 할만하네.


아주머니의 낡은 캠핑카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는 연어낚시 미치광이들이 수백 명 줄지어 있던 강을

쳐다보면서 말하는 중이었다. 강은 햇살이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났다.

선글라스가 없이는 눈을 잘 뜰 수 없었다. 오후 5시 정도 된 시간이었다.

남편은 어디에 있냐고 물으니 '저어~기에 있군' 이라며 손가락을 가리켰다. 때마침 그녀의 남편도 우리가 있는 쪽을 돌아보며 아내에게 손을 흔들었다. 얼굴은 잘 안보였지만 평범하고 선량할 것 같은 자태였다.

슬슬 '저녁은 뭘 먹지' 생각을 할 때가 되어 머릿속으로 내내 그 궁리를 하던 나는 그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오늘 저녁은 뭐예요? 난 맥도널드를 찾아야 할 것 같은데 아마도 2시간은 달려야 나오겠죠?

그러자 아주머니는 정말 무심하게. 정말 평범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음... 저이가 뭐라도 하나 잡아오면 그게 우리 저녁밥이고 못 잡으면 굶어야겠지.


별 것 아닌 말이었는데 그때 나는 어떤 인생의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기분이 들었다.

잡으면 먹는 거고 못 잡으면 굶는 거다. 

이 얼마나 심플한가 말이다. 한 끼쯤 굶어도 안 죽는다. 굶기 싫으면 잡힐 때까지 잡으면 되고.

분명 그녀는 남편이 아무것도 못잡아와도 바가지를 박박 긁지 않을 것이다. 바가지를 긁기엔 풍광이 너무 좋은 곳에 그들의 RV가 주차되어 있었고 몇 십년의 세월을 함께 지내온 그들의 '의리'도 굳건해 보였다.




아주머니는 2시간을 달려 맥도널드를 찾아 가려는 나에게 '그러지말고 내 남편이 잡아올 물고기를 기다렸다가 같이 저녁을 먹자' 고 했다. 잠시 내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때 나에게는 다른 일행들이 있었고

혹시라도, 만약의 경우, 아저씨가 정말 아무 물고기도 잡지 못하고 빈손으로 오게 될 경우 나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를 상상해보니 난감했다. 여행지에서 괜히 무모한 도박을 할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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