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잡아와 줘
남편이 손수 먹을거리를 사서 귀가하기 시작한 지 두 달이 넘어가고 있다.
그의 평생에 처음인 경험. 혼자 장보기. 아픈 마누라 봉양하기.
처음엔 당황하는 듯싶었으나 요즘은 즐기는 것 같을 때도 있다. 특히 오늘처럼 이렇게 말할 때 보면.
ㅇㅇ아 내가 맛있는 거 많이 잡아왔어, 이것 봐. 많이 잡아왔지?
허무맹랑하고 무익한 것들을 상상하기 좋아하는 나는 이런 생각을 자주 해봤다.
내가 만약 3천 년 전쯤 어디선가 살고 있는, 지금과 똑같은 가족 구성원(남편 1, 아들 1)을 거느린 채 살아가는
여자라면 내 남편이 사냥꾼인 것이 좋을까 아니면 어부인 것이 더 좋을까.
삼겹살과 갈비를 포기할 수 없고 고등어구이나 오징어 볶음도 동시에 포기가 안될 땐 바다와 산을 아우르는 그런 옵션은 없을까 그런 환상의 장소는 없을까 하면서 혼자 괴로워하기도 한다.
사냥과 낚시를 같이 할 수 있는 남편이라면 더더욱 좋겠군!
산을 중심으로 바다가 둘러싼 섬이 좋겠어!
이런 기발한 생각을 하면서 무릎을 탁 칠 때도 있다.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는 나도 모름. 그냥. 재밌잖나.
알래스카. 러시안 리버(Russian River). 연어 낚시의 천국 of 천국.
이곳에서 만난 어느 60대 초반 미국 아줌마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이 강을 따라 끝도 없이 줄줄이 서서 낚시를 하는 전 세계에서 모여든 연어낚시 미치광이들을 사진 찍던 중이었다.
그러다가 만난 60대 미국 아주머니. 은퇴한 남편과 아주 허름한 RV를 끌고 알래스카로 올라와 2달째 살고 있다고 했다. 여름엔 알래스카로 와서 지내고 겨울엔 플로리다에서 지낸단다. What a LIFE!!!
아주머니의 낡은 캠핑카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는 연어낚시 미치광이들이 수백 명 줄지어 있던 강을
쳐다보면서 말하는 중이었다. 강은 햇살이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났다.
선글라스가 없이는 눈을 잘 뜰 수 없었다. 오후 5시 정도 된 시간이었다.
남편은 어디에 있냐고 물으니 '저어~기에 있군' 이라며 손가락을 가리켰다. 때마침 그녀의 남편도 우리가 있는 쪽을 돌아보며 아내에게 손을 흔들었다. 얼굴은 잘 안보였지만 평범하고 선량할 것 같은 자태였다.
슬슬 '저녁은 뭘 먹지' 생각을 할 때가 되어 머릿속으로 내내 그 궁리를 하던 나는 그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오늘 저녁은 뭐예요? 난 맥도널드를 찾아야 할 것 같은데 아마도 2시간은 달려야 나오겠죠?
그러자 아주머니는 정말 무심하게. 정말 평범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음... 저이가 뭐라도 하나 잡아오면 그게 우리 저녁밥이고 못 잡으면 굶어야겠지.
별 것 아닌 말이었는데 그때 나는 어떤 인생의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기분이 들었다.
잡으면 먹는 거고 못 잡으면 굶는 거다.
이 얼마나 심플한가 말이다. 한 끼쯤 굶어도 안 죽는다. 굶기 싫으면 잡힐 때까지 잡으면 되고.
분명 그녀는 남편이 아무것도 못잡아와도 바가지를 박박 긁지 않을 것이다. 바가지를 긁기엔 풍광이 너무 좋은 곳에 그들의 RV가 주차되어 있었고 몇 십년의 세월을 함께 지내온 그들의 '의리'도 굳건해 보였다.
아주머니는 2시간을 달려 맥도널드를 찾아 가려는 나에게 '그러지말고 내 남편이 잡아올 물고기를 기다렸다가 같이 저녁을 먹자' 고 했다. 잠시 내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때 나에게는 다른 일행들이 있었고
혹시라도, 만약의 경우, 아저씨가 정말 아무 물고기도 잡지 못하고 빈손으로 오게 될 경우 나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를 상상해보니 난감했다. 여행지에서 괜히 무모한 도박을 할 필요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