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진 반백년
원래는
이 글의 제목을 ‘반백년을 살아보니’라고 하려 했다.
3년 전쯤 출간된 김형석 교수의 책 ‘백 년을 살아보니’ 제목을 흉내 내려고 했던 거다.
3년 전, 한국에 나갔을 때 교보문고에 갔더니 유시민 작가의 책과 김형석 교수의 책이 나란히 베스트셀러 부스에 진열되어 있었다.
나는 그 진열대 앞에서 누구의 책을 구입할까 한참을 망설이다가 둘 다 구입하지 않았다. 좋은 결정이었다.
한국을 떠나는 가방은 언제나 무겁고 책은 언제나 가방의 무게를 가중시키는 주범이니 말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제 '종이책' 은 웬만해서는 구입하지 않기로 마음을 단단히 먹지 않았던가.
이 글의 제목을 타이핑하고 혼자 흐뭇해서 낄낄 거리는 내 모습을 남편이 힐끗 보고
아직 반백살 아니잖아 좀 남았잖아
라고 꼼꼼하게 바로 잡아준다. 이런 꼼꼼쟁이 같으니라고.
아직 반백년을 살지 않았는데 저런 제목을 붙이는 것은 ‘사기’ 란다. 그분은 정말로 100년을 사신 분이니까 정정당당히 저런 제목을 사용하실 수 있지만 나는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이 남편의 논리였다.
그래 인정. 사기는 치지 말아야겠지. 그럼 아직 정확한 반백년이 아니니까 앞에 '얼추'라고 붙입시다.
아무튼 지간에. 얼추 반백년을 살아보니
1. 육체는 반백살일지 몰라도 몸속에 들어있는 내 마음은 아직 반백살 먹은 것 같지 않다.
2. '지천명' 나는 아직 나에게 내리신 하늘의 뜻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공자가 살던 시절 사람들은 50 정도 먹으면 깨달을 수 있었나 보다.
3.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다..라고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말할 때 깊이 공감하지 못했다. 속으로 '돈을 왕창 잃는 것도 만만치 않게 속상할걸'이라고 생각 했었다. 하지만 돈과 건강은 같은 비교 선상에 올려놓을 수 없는 대상이라는 걸 서서히 알아가는 중이다. 둘의 값어치는 너무 다르다.
사는 동안 언젠가는 가장 똑똑했고 언젠가는 무척 아름다웠으며 어느 시점에서는 영민하게 빛났을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각자 나름대로의 그런 시절들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그 어떤 시점에만 그랬던 것이다.
37살에 가장 똑똑했던 내 두뇌가 73살에도 그대로 똑똑할 것은 아니라는 것,
53살 때의 내 정치적 신념이 93살이 된 나의 처지와 나를 둘러싼 세상과 맞아떨어질 가능성은 아주 낮을 것.
나도 변하고 세상도 변하잖나.
혼돈의 2021년 겨울과 2022년 봄을 지내며 주위를 둘러보니 100년을 살든 120년을 살든 얼마나 길게 살았는가 자체에 큰 존경심을 가질 필요는 없고 짧은 생을 사는 아이에게도 배울 점이 넘칠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얼추 반백년을 살아보니
반백 년 이후의 삶은 앞 선 50년을 살았던 것보다 훨씬 강도 높은 다방면의 노력과 수양을 하면서 살아야 인간으로서의 격조와 품위를 지키며 늙을 수 있다는 확실한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이것을 알게 되어서 감사와 평안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