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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밤 Aug 27. 2019

남탕에도 세신사가 있다고?

스무 살에 알게 된 사실

제목에 '때 밀어주는 사람'이라고 쓰기 싫어서 '세신사'라는 낯선- 적어도 내게는- 단어로 바꿔 타이핑을 했다.


그렇다. 저 말은 바로 내가 한 말이었다. 스무 살 때.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먹다가.

정확히 이렇게 말했다. "남탕에도 때 밀어주는 사람이 있다고?" 이렇게.

늘 같이 점심을 먹던 5명의 멤버 중 두 명이 남자였는데 내가 저렇게 말하자마자 그중 한 명이 푸하하 웃느라 입안에 있던 밥알이 사방으로 튀었다. 때문에 일시에 테이블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왜 그랬던지 모르겠지만, 왜 그 나이를 먹도록 알고 있지 못했는지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그때 그 식당에서 스무 살까지 몰랐던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된 거였다.

남자 목욕탕에도 때를 밀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사방팔방으로 튄 친구의 밥알 사태가 조금 진정이 된 후 '밥친구 다섯 명(여자 셋+남자 둘)' 은 다시 좀 전의 주제로 돌아와 이야기를 이어갔다.

여탕에 때밀이 아줌마가 존재한다면 남탕에도 때밀이 아저씨가 존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냐로 시작된 우리의 토론 중간에 내가 또 이렇게 말했다. "남자들은 기운이 좋잖아. 기운도 좋은데 스스로 밀지."

이 발언 역시 엄청난 비난과 야유와 욕을 불러왔다.

그땐 어린 마음에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말했던 거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목욕탕에서 때를 민다는 행위와 기운이 좋고 안 좋고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

그래 내가 잘못했다. 죽을죄를 지었네.


그때 남자애들이 말했던 남탕에도 '세신사'가 필요한 이유 몇 가지는

1. 남자들이 생각보다 그리 기운이 좋진 않다

2. 혼자 목욕을 온 남자들도 등을 밀어 줄 사람이 필요하다

3. 그냥 귀찮다. 남이 해주면 편하다.

4. 피로가 풀린다

등등 정도였다.

다 듣고 보니 여탕과 남탕의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에 쉽게 수긍이 갔다.



찜질방이라는 시설이 탄생하기 이전, 정말로 고전적인 동네 '목욕탕'만이 존재하던 시절에는.

올망졸망한 자식 두 명 정도는 엄마가 목욕탕에 갈 때 데리고 가는 것이 특이할 것도 이상할 것도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우리 엄마도 언니와 나를 아직 동트기도 전인 깜깜한 새벽에 깨워 목욕 바구니를 챙겨 걸어서 5-10분 거리의 동네 목욕탕에 데려가셨다.

목욕탕이 문을 열자마자, 깨끗한 새물을 탕 안에 채우자마자, 입장하려는 우리 엄마의 신념(?)은 정말 대단했다.

어린 두 딸을 싹 씻겨놓고 정작 자신을 챙길 시점이 되면 기운이 다 빠져서 씻을 기력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을 텐데 나는 우리 엄마가 때밀이 아주머니에게 몸을 맡기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아마도 때를 미는 일에 돈을 쓰느니 그 돈을 아껴 반찬값에 보태려는 심산이었거나

어쩌면 그런 일에 쓸 돈은 그 당시 우리 엄마에게 애초에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마음이 짠하다.



그 날. 교내 식당에서 밥 먹던 친구의 입에서 튀어나온 밥알 폭탄을 맞고 '남탕에도 때밀이가 존재한다'라는

귀중한 깨달음을 얻은 날.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그 당시 내 남자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그 날 하루 있었던 일을 자세히 재미있게 설명해 주었다.

내가 얼마나 주변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았는지, 친구 입에서 튀어나온 밥알 때문에 여자애들은 더러워서 밥 먹는 것을 포기했다느니 하는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을 신나게 떠들었다.

"나는 왜 이제껏 그 사실(남탕 때밀이의 존재)을 몰랐을까? 참 이상하네. 간단한 건데"라고 심각하게 혼잣말 비슷하게 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바보니까

라고.


이따가 저녁 먹을 때 한번 물어봐야겠다. 왜 그 때 나에게 '바보'라고 말했냐고. 28년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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