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1)

by Om asatoma

여자가 꺼내 놓은 말은 의외였다. 고작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나 남편에 대한 불만 같은 종류의 말들을 늘어놓을 것 같았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에 대한 이야기로 이끌어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혼자가 이성을 만날 때 자기 합리화는 필수니까.


너를 만나고부터 약을, 먹기 시작했어.


나를 그렇게 사랑했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서 먹는 약인가, 아니잖아, 그런 관계가 아니잖아. 이건 뭐 사랑 근처에도 가지 않을 것 같은데, 그리고 여자는 나로 인해 그리 괴로운 것 같지도 않은데,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잘 웃고 좋아 보이기는 했는데 그럼 그게 다 약 때문이란 말인가. 나로 인해 누군가 편안해하고 즐거워하는 것으로 나도 모르게 자존감이 좀 높아졌었는데 나도 꽤 매력적인 사람이라 생각하고 괜히 어깨가 으쓱하기도 했는데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무도 모르겠지만 조금 민망해졌다.


감당이 안 되더라고. 감정이 휘몰아쳤어. 처음에는 너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그냥 세상에 흔하고 흔한 좀 골치 아픈 관계에 빠진 건가 싶었어. 좋았지. 좋았어. 너를 만나서 좋았어. 너라는 존재 자체가 어떤 영감 같은걸 주었고, 그래서 작업이 더 잘 되기도 했고. 아무래도 동성은 아니니 그런 쪽으로 생각한 적도 있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이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금지된 것에 가까이하면서 오는 혼란 같은 것들. 그런데 오히려 그것에 국한해서 생각하는 게 결과적으로는 상태를 악화시킨 것 같더라고.


쉽지 않은 여자라고는 생각했다. 아니다. 쉬운 여자라고 생각했다. 복잡할 것이 없었다.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 그 순간에 집중했기 때문에 이면에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의도로 저런 말을 하나 고민할 거리가 없었다. 표현되는 것이 전부였다. 리액션이 너무 훌륭해서 저런 식이라면 누구라도 빠져들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잠시 했지만 둘이 함께 있는 그 시간에는 그런 생각조차 끼어들 틈이 없었다. 마음이 잘 맞는 것도 아니었고, 지향하는 바가 일치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뭔가가 완벽했다. 그래, 뭔가가 완벽했다. 완벽하게 느껴졌다. 인간과 인간이 몸을 섞지 않고 이런 방식으로도 일치감을 느낄 수가 있구나를 경험하게 해 준 여자였다. 그런데 지금 하는 말들은 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처음 시작은 그거였어. 회사에서 노크를 하고 네 방에 들어갈 때마다의 망설임이 어디서 오는 걸까 궁금했어. 너의 시간을 뺐는 게 싫었어. 그냥 상대의 입장을 고려한다는 측면이 더 많이 확장된 거라고만 생각했어. 거기에다가 너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조금 있나 보다 했지. 그래서 부담스러운 면이 있나 보다 하고 말았어. 그러다가 알게 되었어.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게 어디서 오는지도 알게 되었어.


그렇긴 했다. 내 방에 들어올 때 다른 직원들에 비해 유난히 조심스러워했다. 배려심이나 조심성이 많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차를 권하거나 안부를 물으면 누구보다 자연스럽게 편안해하며 그 공간을 누렸다! 업무적으로 일이 바쁠 때도 돌아가지 않고 시간을 즐겼다. 주저함이 고스란히 묻어던 노크 소리의 비밀을 찾아냈나 보다.


너의 방을 너의 세계라고 생각하고 그 안에 들아가게 되는 걸 되게 즐거워했어. 너도 알겠지만. 그 안에서 나는 없어지고 너의 이야기만 존재할 때 어떤 편안함을 느꼈어. 랄까, 나에게는 천국이었던 셈이지. 의도적으로 나를 완전히 없앴으니까. 나의 역사나 정체 같은 거 말이야. 어떤 삶을 살아왔고, 누구의 엄마나 부인이라는 것, 어느 집의 장녀인지 뭐 그런 것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냥 너의 이야기를 듣는 존재로만 존재한 거야. 나의 실체는 아무것도 없는 채로 말이야. 네가 살아온 이야기들, 살아가는 이야기들 그 안으로 들어갔다가 빠져나오는 그 느낌이 좋았어.


그랬다. 여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으면 이야기를 끊어버릴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기억의 저편으로 넘어간 이야기까지도 불러오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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