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이면 시점이 박원순 시장이 운명을 달리한 직후여서 자살에 대한 생각이 많을 때였다. 책의 첫 장은 주인공 쓰쿠루가 대학교 2학년 때 어떤 사건으로 인해 자살을 생각하며 지냈던 기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쓰쿠루는 대학 2학년 때 함께 청소년기를 보낸 같은 그룹의 친구들로부터 일방적인 결별통보를 받고 7개월간 죽은 것처럼 살았다. 죽음을 생각했다고 서술 되어있지만 삶의 반대편을 생각함으로써 자신이 속한 삶의 현실을 거부하고 싶었던 것 뿐 적극적 의미에서의 자살을 생각한 것 같지는 않다.
오래전 하루키의 소설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자살이라는 단어를 처음 보았을 때, 마치 금기어를 본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머릿속에서 빨리 지우려고 애쓰고 눈으로 보고도 읽지 않고 건너뛸만큼 낯설고, 입에 담아서는 안 될, 잠시도 내 몸에 머물러서는 안 될 단어처럼 생각한 것이다.
서울 시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세상에는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지만, 건강한 이미지의 성실한 행정가였기에 아직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자살하는 사람들에게 대중이 원하는 극적인 이유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특히,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에게 있어 자살이란 삶에 대한 최선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보다 더는 열심히 살 수 없을 것 같을 때,
모든 것을 걸고 죽을 힘을 다해 살아본 사람들에게는, 스스로 할만큼 했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을 스스로 결정함에 있어 남은 생에 미련이 크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지내온 삶을 보았을 때 보통의 사람들이 몇 번을 죽었다 다시 살아나도 이룰 수 없는 것들을 이룰만큼 모든 에너지를 끌어다가 정성과 열심으로 살았으므로.
생명은 소중하고 떠나감은 너무나 슬프지만 과연 타인은 상상하지도 못할 무게의, 더이상 살아내기 힘든 여정에 대한 자기결정권은 원천적으로 없는 것일까. 살아남은자의 비통함과 슬픔의 깊이는살아남은 자의 몫일 뿐 그것이 감당하기 힘들어 그들의 행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닐런지. 굳이 구별하는 것이 의미는 없겠지만 떠나보내며 흘리는 눈물에 사자의 생에 대한 연민의 눈물은 얼마나 되는 걸까.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에 한 친구가 떠났다. 갑작스럽고 당황됨이 슬픔보다 더 컸던 기억이 있다. 어떻게 마주해야할지도 몰랐고, 어떻게 애도의 시간을 보내야하는지도 몰랐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이 예의인 줄 알고 우리는 침묵한 채 제각각의 방식으로 그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스물일 때와 마흔이 넘어 그 행위를 바라보는 시각은 조금 달라져있다. 물론 그때는 어떠한 생각도 할 수 없었고, 지금도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내가 살아보지도 않은 누구의 생에 대하여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무어라 판단할 수 없음만은 더 분명해지고 있다. 남은 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동안의 그의 수고에 대한, 애씀에 대한, 생에 대한 경의를 보내는 것 뿐. 남은자의 슬픔을 떠난 자의 책임으로 돌려서는 안된다는 것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