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도 없고 목적도 없고 메시지도 없는 의식의 흐름 아무말 대잔치
식물 키우기에는 큰 관심이 없는 편이긴 하지만, 자연 속 식물의 변화를 체감하는 것은 흥미롭다.
마침 얼마 전부터 나무의 새순이 돋아나고, 꽃을 가까이 하게 되는 계절이 되어서 기분이 새롭다.
유달리 길고 길었던 겨울이었음에도, 어김 없이 꽃이 피는 계절이 돌아온다는 것을 체감하였을 때, 시간이란 잔인하면서도 자비롭기도 한 게 아닐지.
식물 키우기에 재주도 관심도 없는 사람이지만, 유일하게 좋아하고 들여보았던 식물이라면 바로 꽃이다.
모든 예쁜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화병에 꽃을 꽂아두면 기분이 좋다.
비록 1주일에서 열흘이면 시들어버려서 그 예뻤던 모습이 온데간데 없이 쓰레기통에 구겨버려야 하는 신세가 되지만 (이 때 좀 마음이 아프다) 어쩌면 인생의 찬란한 순간은 이토록 짧다는 은유라고 생각하며 철학적 의미 부여를 해본다.
첫 해외 근무를 마치고,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독립을 했다. 구파발에 살았고, 당시 막 붐이 일고 있던 당근의 세계에 한참 빠져있던 때였다.
어느날, 우리 동네 당근에 ‘꽃 사다드림 ㅇㅇ’이라는 분이 등장하셨다. 꽃을 좋아해서 매주 꽃시장에 가는데, 도매로 사다보니 혼자 필요한 양보다 많이 사게 되어서 만 원을 받고 꽃 사다드림을 해 준다고 했다.
그 때부터 나는 꽃 사다드림 ㅇㅇ님의 단골이 되었다.
매주 월요일 저녁 8시, 정해진 약속 장소로 가면 꽃을 받을 수 있었다.
꽃집의 사악한 가격 때문에 꽃은 사치라고만 생각했는데, 이 분 덕분에 매주마다 계절별 다양한 예쁜 꽃을 받아 볼 수 있었다. 가격도 만원이라니.. 정말 혜자였다. 꽃집에서 만원이면 다발은 커녕 매우 빈약한 꽃 몇 송이만 겨우 살 수 있는데 비해, 금손인 이 분이 이 꽃 저 꽃 섞어서 예쁜 다발을 매주 다르게 만들어주셨으니.
당시는 코로나 기간이라서 밖에 잘 다니지도 못 하고,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던 때였는데 화병에 꽃아둔 예쁜 꽃 한다발이 생활의 큰 활력소였다.
게으른 나지만 꽃은 매일 물만 갈아주고, 가끔 화병을 씻어주기만 하면 되니 크게 손이 갈 것도 없었다.
그렇게 1년여를 그 분에게서 꽃을 사곤 했는데, 영국으로 두번째 해외 근무를 떠나게 되면서 그 분과도 헤어지게 되었다. 요즘도 꽃 사다드림을 하고 계실까? 문득 궁금하다.
두번째 독립 하우스를 구하면서 구파발 복귀도 고려했으나, 타이밍 맞게 나온 매물이 지금의 동네라서 결국 구파발로 돌아가지는 못 했는데, 당시의 꽃 구독만큼은 아직도 그립다.
최근에는 지하철 역에 꽃집들이 들어서는 것이 트렌드인지, 자주 다니는 지하철역들에 꽃집이 종종 보인다.
3월이 되니 프리지아가 들어왔다.
3월이 되면 왠지 프리지아를 사줘야 할 것만 같은 건 나만의 기분 탓이라는 건 안다.
그렇지만 일종의 봄맞이 의식처럼, 정말 오랜만에 프리지아 한 다발을 사서 기분을 내 보았다.
이번주 출장을 다녀오느라 물을 갈아주지 못 할 것 같아서, 이미 시들기도 했고 하여 출장 가기 전에 고이 버려주고 갔는데, 다시 새로운 꽃을 들여볼까 생각중이다.
사실 이번 출장에 가서도 꽃을 원없이 보고 왔다.
작년에 이어 두번째로 스위스 출장을 가게 됐다. 이 맘 때 항상 스위스에서 주최하는 동북아 안보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스위스와 동북아 안보라니.. 진짜 안 어울리지만 뭐 어쨌든 사연이 있다)
올해 회의는 작년보다 2주 정도 늦은 시기에 개최 되었는데, 그러다보니 작년에 비해 꽃이 아주.. 만발했다..!
숙소가 레만 호숫가 바로 앞이고, 호텔에서 호숫가 산책로로 바로 나갈 수도 있어서 아침 점심 저녁 틈 날 때마다 산책을 나갔다. 똑같은 길이지만, 아침에는 차가운 아침 공기와 함께 스프링쿨러 물을 맞은 청초한 꽃들의 상쾌함, 동이 터오면서 만년설 쌓인 산이 분홍색으로 물드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낮에는 한낮의 태양에 필터 씌운 것 마냥 투명한 하늘 (미세먼지 없는 유럽의 하늘 ㅠㅠ 말모..)과 역시 필터 씌운 듯 색감 쨍한 튤립을 구경하고, 저녁에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의 손톱같은 그믐달과 빛이 거의 없어 꽤나 많이 박혀 있는 별들을 보았다.
매번 같은 길을 걸어도 질릴 틈 1도 없는 산책길… 처음으로 출장에서 돌아가기 싫었다.
역시 나는 유럽에 살아야 하나보다.. 오랜만에 유럽 오니까 영국 살 때 생각도 새록새록 났다. 작년이랑 똑같은 회의에 왔는데, 작년에 봤던 똑같은 이들도 있고, 바뀐 새로운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도 대부분은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같은 일을 계속하는 전문가들의 장점은 이렇게 1년에 한 번씩 리유니언을 갖고 유주얼 서스펙트들을 늘상 한 번씩 본다는 것이겠지. 무언가 연간 리츄얼 같은 일이 있다는 것은 꽤나 괜찮은 것 같다.
나는 내년이면 아마도 과를 옮기게 될 테니 이 출장도 이제 마지막일테지. 두 번이나 온 것도 이미 로테이션이 워낙 빠른 우리 회사에서는 드문 일이다. 이번 출장은 여러모로 새록새록한 점이 많았다. 작년에 한국 들어오자마자 정신도 못 차린 상태에서 끌려 왔던 첫 출장지가 여기였는데, 1년 사이 어느새 이 세계에 익숙해졌고, 뭐가 뭔지 1도 모르겠던 일은 제법 재미있다. 회의에 참여해서 발언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정도의 흐름을 알게 되었다. 물론, 요즘 일이 좀 한가해서 그런 착각을 하는 걸 수도 있는데, 이런 상태로라면 1년쯤 더 해봐도… 어쩌면 조금 더 해봐도.. 괜찮을 거 같기도 ㅋㅋ (아 위험한데..)
돌아오기 싫었던 출장지를 뒤로 하고 다시 서울로 복귀하니, 서울에는 이제 벚꽃이 슬슬 피려는 참이다.
그렇게도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겨울이었지만, 결국 어떻게든 시간은 가고… 예고 되었던 정치 경제 D-Day들도 연달아 터지고.. 이제 불확실성 해소 (맞냐) 의 국면으로 가려는 것을 보면, 시간이란 옆에서 뭔 일이 일어나든 신경 안 쓰고 참 도도하게 제 갈 길을 잘 간다.
무슨 일이 있어도 때가 되면 어김없이 정해진 꽃이 피고, 새순이 돋는다는 것이 이 정신없고 어지러운 세상 속에 때로는 위로가 된다. 자연과 같이 성실하게 산다면 좋을 것이다.
움츠러들었던 기지개를 켜보고 싶은 4월을 시작하며, 다시 꽃 한 다발을 사볼까. 꽃의 아름다움과 생명력과 함께 1분기 동안 사부작 사부작 베타 테스트 마냥 준비해왔던 일들을 좀 더 본격적으로 해 보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싱그럽고 희망찬 4월이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