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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상반기 회고글 - 피아노편

by 온느

상반기 회고글을 쓰기 위해 상반기 중 틈틈이 끄적여 둔 메모와 일기들을 뒤적여 보았다.


돌아보니 4월 중반까지는 우연히 시작한 피아노에 내가 원했던 것보다 영혼을 많이 갈아 넣게 되어서 당황하고 ‘이게 맞나’ 하며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나의 4월 마지막 글은 그러한 고민이 한창이던 중에 쓴 것이다.


(내 마음을 잘 모르겠고 고민이 계속될 때에 그걸 글로 풀어 정리하는 편이다. 머리 속 관념으로만 존재하던 고민을 글이라는 객관적 외부 매체로 풀어놓고 나면 머리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던 고민의 이유나 필요성이 보이기도 하고, 해결책을 찾아가는 실마리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후 드디어 마음 정리가 된 4월의 일기를 가져왔다.



이번달 중반에는 피아노를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몰라서 굉장히 혼란스러워하는 시간을 보냈던 것 같은데, 월말이 된 지금은 마음이 많이 정리되었다. 결과적으로, 다시 피아노가 좋아졌다.


늘 의문이었다.


어린 시절, 그렇게까지 열렬히 좋아하지는 않았던 피아노를 한 번도 그만두지 않고 스트레스 받으면서도 8년을 쳤던 이유가 무엇인지.
전공할 것도 아닌데 이쯤에서 그만두겠냐고 몇 번의 권유를 받았을 때도 왜 매번 단호히 아니라고, 계속 하겠다고 선언했는지 (그러다가 중학교에 가며 일말의 아쉬움도 미련도 없이 단번에 그만두기는 했지만).
그 때는 몰랐지만, 요즘 다시 피아노를 쳐보면서 짐작해 보건데 결국은 ‘소리’를 좋아했던 것 같다. 피아노가 만들 수 있는 소리들. 연습을 하다보면 연주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지만 순간순간 마음에 드는 ‘소리’들이 나올 때. 간혹 내가 냈지만 ‘너무 예쁘다’ 감탄하게 되는 소리들. 그 소리들이 모여 만드는 멜로디 프레이즈들. 그것들이 좋아서 매번 피아노 앞에 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그 어린이는 그 때보다 20살도 훨씬 더 먹은 어른이가 되어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는데, 이유만은 그 때와 다르지 않다. 듣는 게 좋아서, 예쁜 소리를 만드는 게 좋아서 계속해서 치고 있고, 지금보다 조금 더 좋은 소리를 만들어보고 싶어서 연습한다. 다시 피아노와 조금은 친해진 기분이다. 어떻게 다뤄야 할 지 어색하기만 했던 지난 두 달을 거쳐서 이제 조금은 피아노와 교감을 하게 된 기분. (피아노 학원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연습실 피아노도 찾았다!)

대체 지금 이걸 왜 하고 있느냐고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물었는데, 결국 찾은 답은 허무하리만치 단순한, ‘정말 그것뿐이야?’ 싶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히 설명이 될 만큼 강력한 것.

‘좋아해서.’


열렬하고 절절한 사랑까지는 아니어도 매번 다시 돌아오고 싶어지는 그런 정도의 잔잔하지만 끊이지 않는 애정으로 이 악기를 좋아한다. 아마 앞으로도.




꽤 긴 시간 피아노를 배웠고, 다시 하고 싶은 마음도 늘 품고 있었는데, 늘 ‘내가 피아노를 좋아한다고 할 수 있나?’ 의문이었다.


최근에 정여울 작가의 <빈센트 나의 빈센트>라는 에세이를 읽었다. 그 중 이런 대목이 있다.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면서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할 때가 있다. 바로 너무 많은 사람이 좋아할 때다. 빈센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 나는 수많은 마니아의 행렬에 끼기가 쑥스러웠다.


피아노에 대한 나의 마음도 딱 이랬던 것 같다. 피아노를 나보다 훨씬 잘 하는 사람, 훨씬 더 즐기는 사람이 너무나 많고, 조예가 깊은 사람도 너무나 많은 와중에 나 따위가(?) 피아노를 좋아한다고 하기가 왠지 멋쩍은 느낌이랄까.


나를 처음 피아노의 세계로 안내해 준, 첫 피아노 학원도, 첫 레슨 선생님도 소개해줬던 6살 시절 내 단짝 친구는 (아, 물론 친구가 아닌 친구 부모님이 소개해 준 거겠지만ㅋㅋ) 몇년간 계속해서 피아노를 치다가 피아노 전공생의 길을 갔다.


역시나 같은 레슨 선생님에게 배운 동생도 나만큼이나 오랜 기간 피아노를 치다 그만뒀는데, 나보다 훨씬 재능이 있었는지 고등학교 시절에 학교 특활반으로 선택한 피아노반에서 전공 권유를 받기도 했다 (결국 전공하진 않았다) 대학에 가서는 피아노 동아리에 들어가 한참 신나게 활동하며 연주회도 하더라. 나는 피아노에 그 정도의 애정과 열정은 도저히 없었다. 나보다 동생이 피아노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훨씬 크다고 생각했다.


주변 케이스들이 이렇다보니, ‘나 정도 좋아해서는 좋아한다고 할 수 없지’란 생각을 은연중에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오랜 ‘입덕 부정기’를 겪었던 것이다.


그간은 피아노와 나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 지 고민하는 시간이었다면, 이제는 그 고민들은 많이 해소가 되었고, 결국 피아노를 좋아하게 되었고, 이렇게 된 이상 현실적인 이유는 따지지 말고 그냥 마음껏 좋아하자고 결심했다. 그래서 열심히 해보려고 하고.. 새로운 악보들도 이것저것 찾아볼 예정 ㅎㅎ


이렇게 마음을 먹을 수 있게 된 데에는 피아노가 내 삶에 이제 고정적인 루틴으로 자리를 찾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루틴이 아니어서 연습을 한 번 하는 데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는 게 부담스러웠는데, 이제는 그냥 하루에 30분만 거르지 않고 매일 꾸준히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루틴이 정립되었다. 30분 연습해서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미련 없이 피아노를 덮는다. 내일 또 하면 되니까. 오늘만 날이 아니다. 그리고 연습하다 지겨우면 그냥 치고 싶은 거 아무거나 막 친다. ㅎㅎ 어차피 재밌으려고 하는 건데 어때.


덧) 회고하는 김에 상반기에 썼던 피아노 관련 메모들을 더 모았다. 피아노를 통해 삶의 인사이트를 얻기도 하는데 그런 내용들이다. 나중에 두고 보면 좋을 거 같아서 적어본다.


카덴자 부분도 조금 연습해봤지만 여전히 잘 되지는 않음. 이 부분은 음악을 듣고 어떻게 치는 게 좋을지 연구해봐야 할 듯. 결국 고민하고, 어떻게든 부딪혀 몸으로 해 보는 것만이 답이다.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서 회피하고 싶은 문제가 늘 있게 마련이지만 결국 해결법은 ‘직면’이다. 되든 안 되든 정해진 일정 시간을 엉덩이 붙이고 앉아 씨름해보는 것. (나의 다른 어려운 과제들에도 적용 가능) 너무 하기 싫은 그 직면, 부딪힘을 그냥 하는 것밖에 답이 없음. (4.14)


이번주에는 그랜드 피아노로 레슨을 받았는데, 정말 정말 어릴 때 학원 연주회 때 쳐보고는 처음 쳐 본 그랜드 피아노였다. 그렇잖아도 한 번쯤 쳐보고 싶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이렇게 예고 없이 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랜드 피아노로 쳐보니 소리가 더 예쁜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피아노와 연주자의 합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나와 합이 잘 맞는 악기로 치면 똑같은 연주도 더 잘 되고 더 좋은 연주가 나올 수 있는 것처럼,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독서모임 할 때도 내가 더 말을 잘 하게 되고 진행을 잘 하게 되는 멤버들이 있고, 무언가 막힌 것처럼 대화가 피상적으로 뱅뱅 돌기만 하고 좀체 깊어지지 않는다 싶은 힘든 모임이 있다. 나의 잠재력, 능력을 더 잘 표현하게 해 주는 합이 잘 맞는 사람, 파트너를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4.27)


이번주는 매일 매일 피아노 연습하기 거의 달성할 기세다.. 익숙해지기도 했고 부담감을 좀 내려놓으니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잘 하려고 욕심 내거나 스트레스 받지 않고 즐겁게 즐기면서 하는 게 최고인 것 같다. (5.8)


안 되면 포기하는 게 아니라 ‘왜 안 되지? 뭐가 문제지?’ 파악하고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중요. 뭐든지 그냥, 원래 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럼에도 누군가는 되고 누군가는 안 되는 이유는 안 될 때 ‘난 안 되네, 못 하네’ 하고 멈추는 사람과, (할 수 있다, 된다고 믿고) 개선해보려 노력한 사람의 차이가 아닐지. (5.9)


피아노 다시 시작한 지 이제 딱 3개월이 되었다. 처음 시작했을 때의 마음가짐과 지금의 마음가짐이 아주 많이 다르다. 확신도 열정도 없이 시작한 피아노였는데, 3개월이 지난 지금은 아주 많이 익숙해졌고, 훨씬 더 편안해졌으며, 여전히 이걸 열심히 해서 뭐가 좋은지 목적은 알 수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심을 다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사실 그간 점점 빠져들어서, 행동으로는 이미 진심을 다 하고 있었다. 연습을 거의 매일 거르지 않고 갔으니.. 그런데 그 모든 것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진심’ 만은 없었다. 아마 마음의 속도가 머리와 몸보다 조금 느렸나보다. 이제 이 연습량과 성실성에 진심까지 더하면 어떻게 되는거야..? ㅋㅋ 하고 있는 모든 것에 감사하며, 조금 더 마음을 다해, 조금 더 진심을 다해, 조금 더 열정을 다해보기로 마음 먹었고, 그것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를 3개월쯤 흐른 뒤에 또 다시 보기로 하자. (6.8)


모든 음들은 각자의 역할이 있다. 한 음 한 음을 모두 소중히 여기며 역할을 부여해줘야 좋은 연주가 된다. 대충 쳐서는 그저 그런 소리의 나열밖에 안 되는 소울리스한 연주가 된다. 이 음은 어떤 역할을 하게끔 어떤 의도를 갖고 쳐야지 라는 계획이 있어야. 나의 인생의 하루 하루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루, 하루가 마치 악보의 한 음 한 음과 같다. 음 하나하나마다 크든 작든, 중요하든, 다음 단계로의 도약이든, 쉬어가는 느낌이든, 나름의 고유한 의미가 있고 무엇 하나 허투루 할 수 없다. 나의 하루도 인생 속에서 크든 작든, 평범한 날이든 특별한 날이든 하루도 버릴 날이 없는 소중한 날들이다. (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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