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무비 패스 <인랑>
여름 블록버스터
'인랑'이 어땠냐고 묻는다면, '여름 블록버스터'라고 답하겠다. 그런데 이 영화의 감독은 김지운이고, 원작 일본 애니메이션도 존재한다. 김지운 감독에게는 킬링타임용 블록버스터가 아닌 여운이 긴 영화를 바라고, 원작 '인랑'은 액션보다 사유가 중심인 영화다. 즉, 극장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여름용 블록버스터와는 분명 다른 지점을 기대하게 만든다. 차라리 액션을 위한 동력으로 간단한 명제 하나를 중심 사유로 끌고 가거나, 아예 액션을 최소화하고 인물들의 정체성 혼란을 메인으로 갔으면 어떨까.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
시사회가 진행된 용산 CGV 2관은 좌석 간 간격도 넓고 편했다. 에어컨 바람까지 시원해서 폭염을 잊을 수 있었다. 게다가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멋진 배우들의 스케일 큰 액션을 보는 재미도 크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뒷맛이 씁쓸하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감독은 김지운이니까.
정체성 혼란을 겪는 인물들
김지운 감독은 왜 원작 '인랑'에 매혹을 느꼈을까. 원작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는 인물의 정체성 혼란이 가장 핵심이다. 김지운 감독의 전작들은 정체성 혼란으로 갈등하는 이들이 늘 중심을 이뤄왔다. 회사원이자 레슬러(반칙왕), 핵심 조직원이자 배신자(달콤한 인생), 일본 경찰이자 독립군(밀정) 등 혼란을 겪는 인물을 중심으로 극을 만들어왔다.
김지운 감독이 블랙코미디, 공포, 누아르, 액션 등 어떤 장르를 해도 잘 소화하는 이유는 그의 이야기가 결국 같은 지점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
휘발하는 사유
김지운 감독 작품 중 '달콤한 인생'을 가장 좋아한다. 주인공은 오직 하나의 질문을 가지고 움직인다. '나한테 왜 이러셨어요?'.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위해 인물은 내내 전진하고, 그 전진의 과정에서 생기는 액션에 당위성이 자연스럽게 부여되면서 걸작 누아르가 되었다.
'인랑'은 좀 더 한 인물에 집중했어야 했다. 관객은 한 인물의 사유를 따라가는 것만 해도 러닝타임이 벅차다. 그런데 '인랑'은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이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 국제정세가 혼란한 상황이 배경이다 보니 그럴 수 있다. 배경이 그렇다 치더라도 중심을 잡아줄 인물은 한 명이어야 했다. 강동원이 연기한 임중경 한 명에게만 집중해도 힘든 상황에서, 이윤희(한효주)와 한상우(김무열) 등 여러 인물의 감정을 함께 펼치니까 관객 입장에서는 몰입할 감정을 모으기 벅차다. 그러니 마음 편히 따라갈 거라고는 눈앞에 액션뿐이고, 어느새 인물들이 어떤 가치 갈등을 겪는지도 휘발해 버린다.
감독판이 존재하면 좋겠다
분명 '인랑'은 좋은 장면이 넘치는 영화다. 그래서 더 아쉬운 작품이다. 극의 진행을 위해 작위적으로 등장하는 임중경의 감정이 아니라, 임중경이 감정을 동력으로 움직이는 가운데 주변 인물과 상황이 보이는 극이기를 원했다. 너무 많은 것을 쫓느라, 아무것도 잡지 못해서 허무하다. 분명 매력적인데 곱씹을 사유가 없다.
배우들의 연기, 촬영, 무술, 프로덕션 디자인 등 모든 구성요소들이 좋았다. 특히 영화의 주된 배경인 지하수로는 세트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한다. 극 중 거의 모든 인물들의 감정적 혼란을 집대성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제목을 '지하수로'라고 하고 임중경이 수로 안에서 자신의 트라우마와 싸우는 단편영화를 상상했을 만큼 매력적인 공간이다.
좋은 점이 많아서 더 아쉬웠다. 게다가 김지운 감독은 전작을 통해 자신이 제일 잘 아는 걸 증명해왔으니까. 각본에 따라 작위적으로 움직여서 한없이 '인간'으로 보이는 인물에게, 뒤늦게 '늑대'를 주입해도 소용없다고 느껴졌다. 감독도 임중경과 같은 고민을 했을 거라고 본다. 자신이 잘 하는 것과 관객이 원하는 것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건 지금 내가 쓰는 리뷰보다 훨씬 큰 무게를 지닌 거니까. 자신의 선택을 한 거고, 나는 그저 한 명의 관객으로 아쉬운 거고.
관객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간다면 감독 입장에서는 행복할까.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