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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 Sep 07. 2020

눈앞에 있다면 악플 달 수 있겠어요?

악플 달 권리란 없다

생애 첫 악플


"너는 얼마나 깨끗하냐?"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악플은 지금도 선명하다. 지금까지 12년 동안 블로그를 운영했지만 기록용으로 쓰는지라 접근성이 좋지 않아서 댓글이 달리는 일이 거의 없었다. 당시에 어떤 목사의 성범죄 관련 기사 링크를 블로그에 올렸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악플'이라는 걸 봤다.


몇 년도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가 추석 연휴였던 게 기억난다. 왜냐하면 추석 연휴 내내 앓아누웠기 때문이다. 얼굴도 모르는 익명의 누군가가 한 말에 상처 받아서 앓아눕는 나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의 원인을 나에게서 찾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나약할 수밖에 없고, 악플을 단 사람이 나쁜 거지 내가 나쁜 건 아니니까.


앓아눕는 동안 악플이 얼마나 아픈 건지 알게 됐다. 악플 한 줄에도 이렇게 아픈데, 악플에 시달리는 이들은 얼마나 아플까 싶었다. 가장 큰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악플은 여전하다는 거다. 자신에게 악플이 달리면 얼마나 아플지 뻔히 알 텐데 악플은 줄어들지 않는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라는 옛말은 틀렸다.


최근 몇 년간 내 삶에 취미로서 확고하게 자리 잡은 것 중 하나가 아이돌 '덕질'인데, 유튜브에 해당 아이돌을 검색하니 악의적으로 편집한 영상이 올라와있다. 나의 가족이나 친구가 말도 안 되는 소문에 휩쓸려서 욕을 먹는 것처럼 기분이 나빠졌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라는 옛말은 확실하게 틀렸다. 남의 집 굴뚝에 불을 피우고, 본 적도 없는 남의 집 굴뚝을 묘사하는 이들에 대한 사례는 넘쳐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남의 집 굴뚝을 가지고 장난치고 있다. 그 장난의 파급력이 얼마나 강한지 모른 채. 아니, 알고도 모른 척하면서.


얼굴이 알려진 아이돌에 비해, 악의적으로 편집한 영상을 올린 사람이나 덩달아 아이돌을 욕하는 이들은 익명이다. 악플을 다는 이들은 얼굴이 조금이라도 알려진 이들은 욕을 먹어도 되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걸까. 과연 그들이 눈앞에 있어도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감당해야 하는 악플이란 없다


얼마 전에 인스타그램에 '맞팔'을 안 해준다고 악플이 하나 달렸다. 인스타그램을 만든 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겪은 일이다. 그 이후로 인스타그램에 악플이 달릴까 봐 신경 쓰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나의 감상을 적는 정도의 공간이 언젠가부터 감시를 받는 공간처럼 느껴진다. 무시하고 싶어도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인플루언서로 불리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 악플을 받을까.


'유명하면 감당해야죠'


연예인 악플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는데,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다. 욕하는 이들이 비난받아야지, 어떻게 욕을 먹는 사람한테 그 화살을 돌릴 수가 있겠는가. 조금이라도 유명해지면 말도 안 되는 비난을 무조건 감수해야 하는 것인가? 만약에 비난 때문에 죽는다면 그 죽음을 자기들이 감당할 것도 아니면서. 자신에게 관대하고 타인의 작은 실수에도 비난을 서슴지 않는 이들이 점점 늘어남을 느낀다. 익명성 뒤에서 역지사지는 다른 세상 이야기가 된다.


이 글을 쓰면서도 피로를 느낀다. 박애주의자들이 넘쳐나는 세상을 기대하지 않는다. 적어도 악플을 정당화하는 세상은 안 된다. 내가 듣기 싫은 소리 남에게 안 하면 세상은 깔끔해질 거다. 그러나 세상이 더 좋아질 거라는 희망조차도 무기력하게 만들 만큼, 온갖 채널에 악플이 넘쳐난다.


죽는 날 자신이 쓴 모든 댓글이 몸에 새겨진다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현실에 좌절할수록 괜한 상상만 늘어난다.



*커버 이미지 : 윌리엄 블레이크 '위대한 붉은 용과 바다의 짐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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