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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 Sep 14. 2020

암막커튼과 치실, 일상을 구해줘

체감할 수 있는 일상의 변화는 사소한 것에서부터

루틴


일상의 루틴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일어나자마자 공복에 먹는 영양제를 먹고, 사과를 하나 먹은 뒤에 다른 영양제들을 섭취한다. 양치질과 세수를 한 뒤에 로션을 바른다. 10개 정도 되는 영양제는 성분과 가격을 봐서 더 괜찮은 제품이 있으면 다른 종류로 바꾸기도 한다. 하루 중에 반드시 해야만 하는 과정을 루틴이라고 부르며 살고 있다.



치실


"치실을 열심히 하셔야겠어요."


한 달 전쯤에 치과에 가서 스케일링을 받으며 들은 말이다. 하루에 양치질을 3~4번씩 하는데 왜 이렇게 치석이 생기는 걸까. 치과에서는 치실을 하라는 답이 돌아왔다. 나의 루틴에 치실이 추가된 거다. 다이소에서 치실을 사서 집에 돌아와서 그날부터 바로 치실을 시작했다. 


치실을 쓴 지 이제 거의 한 달 정도 되어가는데, 그새 나의 루틴으로 자리 잡아서 작은 거라도 먹은 뒤에 치실을 안 하면 허전하다. 진작부터 했다면 치아도 지금보다 건강했을 텐데, 뒤늦게 시작해서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루틴이 늘어난다는 건 여러모로 귀찮은 일인데, 나이가 들수록 루틴은 점점 늘어날 거다. 애석하게도 지금 내가 가진 루틴들을 보면 예방 차원에서 하는 것보다 뒤늦게 후회하며 시작한 게 더 많다. 



암막커튼


코로나 이후로는 극장에 간 날이 손에 꼽는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왓챠나 넷플릭스, 네이버 시리즈 등을 통해 영화를 보는 날이 늘어간다. 방에서 불을 끄고 영화를 보려고 하면, 커튼으로 가려지지 않는 햇빛이 그대로 창을 통해 들어온다. 밤이 배경인 어두운 영화라도 보려고 하면 빛과의 사투가 필요하다. 


그래서 떠올린 게 암막커튼이다. 인테리어에 전혀 관심이 없는지라 커튼을 살펴보는데, 신세계로 느껴졌다. 없던 관심도 생길 만큼 커튼의 세계는 아름다웠으나, 곰팡이가 걱정되는 내 방에 화려한 커튼은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미적인 부분은 잠시 접어두고, 빛을 가린다는 목적에 맞는 가성비 좋은 커튼을 주문했다.


며칠 뒤 저녁, 제법 쌀쌀해졌다고 생각했으나 집에 도착한 커튼과 커튼봉을 설치하고 나니 땀범벅이 되었다. 설치가 끝나니 밤이었고, 밤에는 암막커튼의 성능이 잘 발현되지 않는다. 다음날 알람에 눈을 뜨고 나서 그 진가를 알게 되었다. 평소 같았으면 해가 뜨기 시작하는 새벽에 눈이 떠졌을 텐데, 빛이 차단되어서 밤인지 아침인지 모를 어둠 속에서 깨지도 않고 푹 잤다. 재택근무 때마다 컴퓨터 앞에 앉은 나의 뺨을 위협하던 햇빛과도 이별하게 되었다. 집에서도 선크림을 발라야 하나 고민했는데, 암막커튼 덕분에 선크림이라는 루틴을 추가하지 않게 되었다.



거대한 사건 대신 사소한 변화로 바뀌는 일상


삶이 바뀌는 걸 체감하는 건 피부에 닿는, 매일 느낄 수밖에 없는 변화이다. 코로나를 가장 크게 실감하는 게 마스크 착용인 것처럼. 암막커튼과 함께 이젠 내 방에 들어오는 빛을 막을 수 있다. 밥을 먹고 나서 양치질을 하고 리스테린으로 가글을 하는 루틴에 치실이 추가되었다. 


집에만 있다 보니 어떤 거대한 사건을 기대하기 힘들다. 자연스럽게 일상을 좀 더 오래 바라보고, 사소해 보이는 루틴을 살피게 된다. 나의 삶을 구원해줄 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큰 스케일의 일이 아니라, 암막커튼과 치실처럼 지금 당장 내 손으로 이뤄낼 수 있는 작은 것임을 깨닫는다. 루틴이란 언제나 불완전하지만, 사소한 변화들이 잔뜩 쌓이면 제법 단단해지지 않을까. 


불안한 삶의 부족한 부분을 찾아내고 보완하는 작업이 재밌다. 방을 둘러보니 베개도 바꿔야겠고, 마우스도 바꿔야겠다. 지출을 위한 합리화 같기는 하지만, 투자라고 생각하고 하나씩 바꿔본다.



*커버 이미지 : 아담 엘스하이머 '이집트로의 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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