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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 Sep 14. 2017

사내 자슥이 발레를, 해버렸다

남자에디터의 발레체험기

“마, 사내 자슥이 어데 발레고?”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난 그저 발레를 하겠다고 했을 뿐인데, 수능을 다시 본다고 했을 때의 반응과 비슷하다. 지금의 이 반응은 수능을 다시 본다고 했을 때와 비슷하다. 그건 너의 삶에 없는 선택지잖아! 너의 수염과 굵은 장딴지가 발레에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 조언인지 비난인지 모를 말들이 날아들어왔다. 모의고사 점수에 상관없이 수능에 응시가능한 것처럼, 발레 또한 성별에 관계없이 시작가능하다. 다만 편견이 존재할 뿐.



“운동을 왜 하냐고? 죽을까봐”


내게 운동이란 최소한의 생존장치 같은 것이다. 일을 시작한 뒤로 목과 허리의 통증이 커졌고, 병원에 가보지 않아도 이것이 디스크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일주일에 70시간씩 일할 때도 거뜬했었는데 체력에 대한 나의 오만은 얼마 가지 못했다. 기면증에 가까운 피로가 나를 엄습해오는 일이 갈수록 빈번해졌다.


그래서 헬스를 시작하게 되었다. 안 하면 죽을까봐 퇴근하자마자 헬스에 가서 마치 오늘의 마지막 업무인 것처럼 정해진 기구들을 차례차례 했다. 그 덕분에 죽지 않았다.


“갑자기 왜 발레냐고? 죽을까봐”


업무량과 스트레스 때문에 고열로 쓰러졌던 적이 있다. 죽을까봐 운동까지 했는데 죽을 것처럼 아픈 게 화가 났다. 쓰러져서 나 자신에 대한 연민이 잔뜩 올라온 상황에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어차피 힘들어서 쓰러질 삶이면 틈 날 때마다 하고 싶은 것을 해버리자!


전역한 뒤에 복학을 하고,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느라 잊고 있던 버킷리스트를 꺼내보았다. 군대에서 틈 날 때마다 하고 싶은 일을 적었던 버킷리스트 첫 줄에는 물음이 하나 적혀있었다. 



“내 몸에도 선이 존재할까?”


처음에는 이 문장 속 ‘선’이 무엇인가 싶었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보니 어느새 눈앞에는 엠넷에서 하던 프로그램인 ‘댄싱9’이 펼쳐졌다. 남자댄서들이 자신의 순서가 되자 춤을 췄다. 손과 발의 작은 움직임이 모여서 몸에 거대한 선을 만들어낸다. 발레동작처럼 보이는 동작들 안에서 목격했다. 몸의 ‘선’이라는 것을.


“내 몸에도 선이 존재할걸?”

고열에 시달리고 얼마 안 되어서 회사를 그만두고 이직을 했다. 마침 합류하게 된 회사가 마일로다. 그래서 마일로 앱으로 발레를 찾았다. 댄스보다 발레를 먼저 찾은 이유는 도전하는 김에 좀 더 진입장벽이 높아 보이는 분야에 도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발레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더 놀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발레를 등록했습니다. 이제 뭘 해야 하죠?”


발레스튜디오를 찾아서 1대1 레슨을 신청했다. 몸 속에 수분만큼이나 많은 창피함을 함유하고 있는 내가 처음 보는 이들 앞에서 발레를 자연스럽게 할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처음부터 창피하다고 시작도 전에 도망가는 것보다 최대한 나 자신에게 편안한 환경을 제공하고 싶어서 1대1 레슨을 신청했다.


마일로를 통해서 신청한 뒤로 스튜디오에서 문자가 왔다. 수업 전에 참고하기 위해서 운동경험, 아픈 곳 등에 대해서 물어왔다. 몸을 쓰는 일이니 솔직해야한다는 생각에 헬스 이외에는 운동경험이 거의 없고, 운동신경도 떨어지고 유연성은 제로에 가깝다고 고해성사에 가까운 답장을 보냈다.


“편한 복장으로 오세요”


발레를 등록하자마자 뱃살과 다리털이 발레복을 뚫고 나오는 나 자신의 비주얼을 걱정했다. 발레복을 입고 압구정을 살찐 거위처럼 돌아다니는 상상을 하니 시작도 전에 기운이 빠졌다. 포털사이트에 발레복이라고 검색을 하고 나니 이것은 내가 입기에는 벌칙복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스튜디오에서 온 안내문자가 내 걱정을 덜어주었다. 안내문자에는 몸의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는 핏의 운동복을 입으면 되고, 발레화는 아직은 따로 챙겨올 필요가 없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첫시간에는 어느 정도의 유연성을 가졌는지도 체크해봐야 하니 기본동작과 스트레칭 위주로 할 것이라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단숨에 영화 ‘블랙스완’을 찍을 생각을 한 자신이 조금 무안해졌지만, 덕분에 좀 더 편해진 마음으로 운동복을 챙겼다.



“마, 사내 자슥이 진짜 발레고!”

발레스튜디오에 들어서자 나를 반겨주는 선생님은 ‘발레리나’라는 단어를 들으면 떠오르는 모습 그대로였다. 선생님이 무심하게 걷는 모습조차 우아하게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일까.


탈의실에서 금방 옷을 갈아입었지만 바로 나가지 않고서, 괜히 심호흡도 한 번 하고 거울 앞에서 ‘발레스러워 보이는’ 발동작과 손동작을 해보다가 속으로 외쳐본다. 마, 사내 자슥이 진짜 발레를 시작한다!



“발레봉을 잡으면 될까요?”


발레봉을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묻자 선생님이 나의 조급함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인지 문진표 같은 것을 준다. 양식을 보니 지난번에 문자로 한 번 물었던 운동경력, 아픈 곳 등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쓰게 되어있다. 내 몸에 대해 적어 내려가면서 내가 내 몸의 유연성이나 건강상태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음을 느낀다.


나 자신에 대해 잘 모르지만 내 상태가 별로 안 좋다는 것은 안다. 선생님에게 내 몸 상태에 대한 변명을 일장연설하듯이 풀어낸다. 선생님, 제 마지막 스트레칭은 일천구백구십구년이었던 것 같구요, 허리가 어쩌구, 목이 어쩌구, 내 몸이 어쩌구, 세상이 어쩌구…


선생님은 이 모든 말을 단숨에 삭제시키는 온화함을 가지고 대답했다.
 

“그럼 시작해볼까요?”


발레봉 대신 내가 잡게 된 것은 매트였다. 매트 위에 앉아서 멀뚱멀뚱 주변을 살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몸 안에 숨이 도는 것을 느낍니다'라고 말하며 선생님은 명상을 권했다. 머리 속을 돌아다니는 잡념들이 명상을 방해한다.


잡념은 주로 발레에 앞서서 드는 걱정들이었다. 허리디스크, 햄스트링, 러브핸들......발레를 하면 들키게 될, 숨기고 싶은 신체부위에 대해 생각하느라 집중이 거의 되지 않았다. 명상 그까짓 거 그냥 눈 감고 멍 때리면 되는 거 아냐, 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미련하게 느껴질 만큼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아하게 서 보겠습니다"


명상이 끝나고 드디어 발레가 시작된다. 선생님은 발레의 우아함에 대해 강조했다. 서 있을 때도 날개뼈는 양쪽이 서로 만날 것처럼 젖히라고 했다. 그러자 목이 닭처럼 앞으로 튀어나왔다. 목을 반듯하게 세우자 어깨가 말린다. 어깨를 펴면 가슴이 튀어나온다. 가슴을 집어넣으면 다시 날개뼈가 튀어나온다.


백조보다는 사육장에서 튀어나온 닭처럼 푸드덕거리며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자, 보다 못해 선생님이 하나하나 자세를 잡아준다. 우여곡절 끝에 ‘가만히 서 있는 자세’가 완성된다. 분명 몇 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똑같이 가만히 서있지만 분명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선생님을 따라 팔을 뻗어 본다. 손끝으로 마치 벽을 찌르듯 팔을 곧게 뻗는다. 거울로 자세를 확인하다가 보고 말았다. 내 몸의 ‘선’을.
 

“안녕, 난 네 몸의 ‘선’이란다”


계란 하나를 쥐는 느낌으로 손을 살짝 쥐어본다. 허공에 계란을 만들고 그것을 손으로 살며시 잡는다. 깨지지 않게, 그렇다고 놓치지도 않게 강약을 조절해서 잡는다. 동작을 하는 동안에 계란은 항상 내 손 안에 있다. 계란이 든 두 손을 양쪽으로 뻗었다가, 위로 들어 올리고, 살며시 내린다.


처음에는 계란을 신경 쓰느라 정신이 없다. 정면을 응시하라는 선생님의 말에 앞을 본다. 거울 속 내가 그럴듯한 손모양을 하고 팔을 양쪽으로 뻗었다가 위로 올린다. 손을 다시 천천히 내려서 단전 앞쪽으로 손을 모은다.

처음 보는 내 몸의 동작이다. 나는 오늘 처음으로 내 몸의 ‘선’을 만났다. 언제나 있었지만 온전히 목격하는 것은 처음인 내 몸의 ‘선’을 말이다.



“이제 언제 어디서나 너를 만날 수 있어”


첫 수업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갔다. 큰 동작이 있던 것도 아닌데 땀으로 샤워를 했다. 큰 동작을 하지는 않았지만,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에 크게 집중했다. 내 유연성에 따라 앞으로의 진도는 달라질 수 있다고 한다.

집에 오는 길에 버스 한쪽에서 사람들 모르게 내 손에 집중한다. 계란 하나를 움켜쥐듯 조심스럽게 손을 말아쥐고 위로 올려본다. 15도 정도밖에 안 올려서 티도 안 났지만 괜히 주변 눈치를 본다. 버스 창문에 비친 내 몸의 선을 본다.
 

“사내 자슥이 발레를, 해버렸다”


이제 막 시작한 발레지만, 내가 발레를 시작했고 그 세계에 진입했다는 것은 몇 달 전까지는 상상도 못 했던 사건이다. 그렇다고 하루종일 발레 생각이 나거나 나 자신이 환골탈태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나의 삶은 이전과 비슷하지만, 나 자신의 몰랐던 면을 발견하는 순간이 전보다 늘었다. 내 몸의 선을 목격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내 몸의 선에 집중할 만큼의 여유가 없었을 뿐.

샤워를 하면서 몸을 좌우로 젖혀보고, 양치질을 하면서 발을 모아보고, 버스 손잡이를 우아하게 잡아본다.

그렇게 내 일상의 발레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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