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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 Dec 29. 2020

불안해야 예술을 할 수 있단다

믿고 싶지 않은 말

"불안해야 예술을 할 수 있단다"


누군가는 말했다. 가수였을 수도 있고, 배우였을 수도 있고, 작가였을 수도 있다. 불안해야만 예술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자신이 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믿는 이들. 불안이 에너지라고 믿는 이들. 


나는 불안하다. 올해 쓴 글들을 살펴보면 '불안'이라는 단어가 가장 많을 것을 알고 있다. 나의 상태를 불안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지만, 불안이 제일 적절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예술을 하고 있지는 않다. 내가 쓰는 글은 '예술'보다는 '노동'의 연장선이다. 예술이라고 부르는 순간 고귀해 보이고 부담만 될 뿐이다. 예술의 기준을 누가 정하는지 모르겠지만, 예술은 누구나 획득 가능한 단어다. 누군가는 범접할 수도 없이 큰 단어처럼 숭배하듯 모시지만, 예를 들어서 글쓰기로 본다면 방구석에서 자신의 공상을 일기장에 쓰는 사람이나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나 예술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예술가가 아니라 글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노동자가 되기를 원한다.


"요즘 행복해서 노래가 별로인가 봐."


어떤 뮤지션의 새로운 노래를 들으면서 지인은 말한다. 행복이 예술 작품이 완성되는 데 있어서 방해가 되는 요소일까. 맞기도 하고 틀린 말일 거다. 일단 행복과 불행의 기준을 잡는 것도 쉽지 않다. 마음을 기준으로 하자면, 마음은 자신만이 아는 것일 거다. 자본을 비롯해 환경을 이야기하자면, 물질적인 것이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다. 


불안한 채로 하는 예술, 행복한 채로 포기한 예술. 나는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후자를 택하겠다. 애초에 내가 글을 쓰는 것도 행복하고 싶어서니까. 늘 따라다니는 불안에서 벗어나서, 행복에 조금이라도 가깝게 닿기 위해서 뭐라도 하자고 해서 쓰는 거니까. 글을 쓰는 동안 행복한 것도 아니다. 글이 누군가에게 닿아서, 잘 읽었다고 하는 독자의 말에 기분이 좋아지는 거지. 타인에 의해 완성되는 글쓰기이므로, 결국 불안할 운명일지도. 


내가 좋아하는 예술가가 실제로 불안을 원동력 삼고, 행복해져서 더 이상 창작을 안 한다고 하면 섭섭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 행복해서 창작도 잊고 행복에 푹 빠져서 산다면, 기꺼이 축하해주고 싶다. 나도 결국은 그러고 싶을 테니까. 결핍 때문에 쓴다는 건, 결국 결핍에서 벗어나 충만해지길 바란다는 가장 큰 증거일 테니까.




*커버 이미지 : 에드바르 뭉크 'Evening on Karl Johan Str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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