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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 Jan 05. 2021

스터디명 : 김신조

결국 잘 되기를 바라는 스터디

'얼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


김은 늦은 나이에 대학에 들어갔다. 신입생이 된 김은 일명 '새터'라고 불리는 새내기 배움터에 가야 하는지 몹시 고민했다. 한번 망친 대학 생활을 리셋하고 싶어서 수능까지 다시 보았는데,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는 생각으로 새터에 가기로 한다. 김은 떨리는 마음으로 새터 참가자들이 모인 강의실로 향했다.


김은 어색하지 않은 척 노력했지만, 남들보다 나이만 많았지 경험은 부족한 탓에 어색함을 숨기기 힘들었다. 새터가 첫 모임일 텐데 벌써 친해 보이는 이들은 무슨 사연인 걸까. 표정관리를 한 채 귀를 활짝 열고 주변의 소리를 살핀다. 


"안녕하세요. 저는 주얼리라고 해요."


뒷자리에 앉은 이의 목소리는 사람으로 가득한 강의실에서도 선명하게 꽂히는 주파수였다. 이름이 주얼리라는데, 순한글 이름인 걸까. 차근차근 들어보니 나와 같은 학과이다. 타이밍을 봐서 아는 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캐릭터가 그려진 새파란 티셔츠를 입으라며 나눠줬고, 옷을 갈아입은 채 강원도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서 장기자랑을 시킨 덕분에 동기들끼리 서로의 흑역사를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김은 버스 안을 시작으로 새터가 끝날 때까지 소녀시대의 노래를 열 번도 넘게 불렀다. 


새터가 시작되고 각종 레크리에이션이 계속되는 가운데, 주얼리는 분위기를 초치는 깽판을 쳤다. 주얼리와는 같은 조가 아니었지만, 주얼리의 명성은 금세 새터에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 퍼졌다. 학교 생활을 시작하기도 전에 논란의 캐릭터가 된다는 게 안타까웠다. 


김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조장이 되어서 레크리에이션마다 소녀시대의 노래를 부르기 바빴다. 그런 와중에 주얼리에 버금가는 깽판을 치는 인물들이 학과마다 한 명씩 등장했다. 새터의 분위기는 가라앉았고, 적응하기 힘들다고 반응하는 동기들도 등장했다. 그리고 새터가 끝날 때쯤, 그들이 '프락치'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동기인 척 잠입해서 상황을 험악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선배들.


주얼리의 성은 '주'가 아니라 '조'였고, 본명은 당연하게도 '얼리'가 아니었다. 정체가 밝혀진 뒤에 조에게 슬쩍 가보았다.


"야, 애들이 나랑 밥도 안 먹어주더라."


조는 자신에게 주어진 주얼리를 너무 열심히 연기했다. 그 덕분에 김의 동기들 중에서는 여전히 조를 무서워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이후에 희곡 소모임에서 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조도 선배 중 한 명이었다. 뒤풀이가 길어지는 날에는 차가 끊겨서, 집 방향이 비슷한 이들끼리 함께 집까지 두 시간 가까이 걸어가기도 했다. 함께 걸어가던 이들 중 졸업을 한 선배도, 소모임을 나간 동기도 생기는 가운데 남은 건 김과 조였다. 덕분에 김과 조는 함께 야시장과 밤바람을 헤쳐나가는 날이 많았다. 김은 거의 잠든 채 걸을 때가 많았다.



버스보다 빠르게 남산 오르기


희곡 소모임은 선배들의 유대가 꽤 단단한 편이었다. 


'연극 볼 사람'


선배들에게 연극 볼 사람을 구하는 연락이 왔고, 김은 공짜 연극을 본다는 생각에 그러겠다고 했다. 알고 보니 그 연극은 선배가 조연출로 참여하는 작품이었다. 김과 조 등 몇 명이서 연극을 봤고, 조연출로 참여한 선배도 처음으로 보았다.


선배의 성은 '신'이었다. 신은 연극에 대한 뜻이 깊어 보였다. 조와 신은 학번은 달랐지만 동갑이었다. 조는 신과 친했고, 최근 들어서 김과도 친해졌기에 조, 김, 신, 셋이서 만나는 날이 많아졌다. 셋은 지금도 과거에 같이 찍은 사진을 보며, '너 이때에 비하면 지금은 진짜 사람 된 거다'라는 등의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김은 여름방학을 맞이해서 토익학원을 등록한다. 앉아서 공부하는 것에는 영 소질이 없지만, 학교에서 놀기만 하다가 오랜만에 공부를 하려니 꽤 흥미로웠다. 학원 등록 이후 본 첫 시험의 성적도 괜찮았다. 목표한 점수를 도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학이 절반쯤 지났을 때, 학교에서는 학과를 둘러싼 문제가 많았다. 학과의 모든 이들이 시위에 참여했고, 김도 그중 한 명이었다. 김은 피켓을 든 채 본관 앞에 서있었다. 무더운 여름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보니 목 뒤가 바싹 탄 채 따끔거렸다.


"요즘은 뭐하고 지내냐."


시위 현장에서 마주한 신은 피켓을 들고 내 옆에 섰다.


"토익 해요."


"네가 무슨 토익이야. 연극이나 하자."


신은 시위하는 학과생들의 메시지만큼이나 명확하게 자신의 메시지를 소구 했다. 형용사와 부사를 적극 활용한 말부터 담백한 본론만 활용한 말까지 다양한 화술을 구사했다. 


김은 눈을 떠보니, 연극 연습을 하고 있었다. 토익학원을 환불받고, 연극에 배우로 참여한 것이다. 신체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오전에 스트레칭부터 달리기 등 각종 훈련을 했고, 오후에는 발성 연습 등을 했다. 김은 발성에는 능력이 없어서 연극을 하는 3일 동안 큰 소리를 내고, 연극이 끝난 뒤 목소리를 잃는 것도 단기적으로 좋은 전략일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올 거니까, 너희는 걸어서 와."


한 번은 남산에서 훈련을 한 적이 있다. 신과 조연출을 맡은 선배는 버스를 탔고, 김과 다른 배우는 걸어서 올라갔다. 걸어서는 버스를 이길 수 없고, 내내 뛰자니 긴 거리라 경보하듯 빠르게 쉬지 않고 걸었다. 


결국 김은 버스보다 빠르게 남산에 올라왔다. 당시 김은 남산에 자주 갔기에, 돌아가는 버스에 비해 빠르게 올라가는 길을 알고 있었다. 취업도 전이지만 보상에 대한 의식이 강했던 김은 신에게 슬러시를 사달라고 했고, 슬러시를 마시면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슬러시는 달콤했지만, 남산에서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발성연습을 한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흑역사임에 틀림없다.



스터디명 : 김신조


김과 신과 조는 늘 비슷한 고민을 했다. 어떻게 하면 등단을 할 수 있을까. 김은 시나리오, 신은 희곡, 조는 소설을 쓰고 싶어 했다. 셋은 자주 모이기는 했으니 뭐라도 하자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들은 스터디를 시작하기로 했다. 셋의 성을 따서 스터디 이름은 '김신조'로 하기로 했다. 반공의 메시지를 담은 스터디 같지만, 우리는 순문학에 대한 열망으로 스터디를 시작했다.


다만 스터디가 지속되기에는 우리의 기질은 꽤 달랐다. 김은 완성도가 낮아도 한 편이라도 더 쓰는 게 좋다고 여겼다. 게다가 스파르타식 진행을 좋아해서 매주 한 편의 작품을 완성하고, 한 주라도 안 해오면 벌금을 만원은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은 발동이 걸리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편이었고, 조는 매주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애석하게도 김신조 스터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차라리 그때 우리가 했던 헛소리나 헛짓거리를 녹화했다면 영화라도 만들지 않았을까."


스터디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꾸준히 인연은 계속되고 있다. 김의 하드디스크에는 여전히 '김신조'라는 이름의 폴더가 존재한다. 눈 뜨고는 못 볼 작품들이 숨을 쉬고 있다. 지금은 예전처럼 자주 모이지도 못해서 그런지, 당시 그 시절을 진짜 녹화라도 했다면 어땠을까 싶다. 타인에게 특별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김, 신, 조, 세 사람에게는 특별했을 거다.


"그래도 셋이서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요?"


김은 지금도 셋이 만날 때면 이런 이야기를 던지곤 한다. 서로 글 이야기를 썩 많이 하진 않고, 조심스럽기까지 하다. 이젠 등단보다도 현실을 생각하는 시간이 더 길어졌으니까. 


무엇이 되었든 결국 잘 되기를 바란다. 그건 김이나 신이나 조나 비슷한 마음일 거다. 서로 비슷한 만큼의 행복과 불행을 가져야 그 인연이 오래간다는 건, 세 사람 모두 삶을 통해 알고 있으니까. 그러므로 언젠가는 부활할지도 모른다. 김신조, 라는 이름을 가진 스터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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