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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 Jan 08. 2021

회사를 그만두고 다음날, 숨어있다가 간 졸업식

도망친 자의 대학교 졸업식

"조금 일찍 퇴사해줄 수 있어요?"


퇴사를 앞둔 '김'은 팀장으로부터 퇴사 날짜를 조금 앞당길 수 있느냐는 말을 들었다. 회사에서 며칠 뒤에 팀원 전부를 모으고 그동안의 일을 회고하는 시간을 가질 텐데, 그 자리에 퇴사 예정자가 있는 게 그림이 썩 좋지 않은 것 같다는 게 이유였다. 김은 더 이상 떨어질 정도 없다고 느꼈다. 여기에서 괜한 고집을 부릴 만큼의 미련도 없었다. 김은 알았다고 말하고 캘린더에 퇴사일을 표시했다. 퇴사 다음날은 김의 대학교 졸업식이었다.


감정적으로 쌓인 게 꽤 많았지만 갑작스러운 퇴사였다. 남들은 어떻게 퇴사하는지 알 수 없지만, 김은 자신이 정해놓은 마음의 마지노선이 있었다. 이 선을 넘으면 퇴사해야지, 라고 자신만의 선을 긋고 늘 아슬아슬하게 넘을 듯 말듯한 그 선을 바라보았다. 첫 회사였고 퇴사를 결심할 때는 엄청난 감정의 폭풍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힘든 과정이 차오르던 순간들이 모두 지나고 나서, 퇴사를 결정할 때쯤은 평온했다. 팀장에게 면담을 요청했고, 팀장은 예상했다는 듯이 말했다. 잘 감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걸까. 


"졸업식 안 가도 돼?"


김의 어머니가 김에게 물었다. 김은 출근 때문에 못 간다고 말했다. 휴가 써서라도 가야 하는 거 아니냐. 졸업식에 못 가는 게 아쉬웠는지, 어머니의 말이 길어졌다. 김은 못 간다는 말 이외에는 하지 못했다. 평소에는 연락도 잘 안 하는 학교가, 졸업식 같은 소식은 왜 집에 알리는 걸까. 괜한 마음에 학교 탓을 해본다. 김은 집안의 장남이었고, 김의 어머니는 아들의 졸업식에 꽃을 들고 가서 사진을 찍고 근사한 점심을 먹고, 카카오스토리에 졸업식 풍경을 올리는 모습을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다녀올게요."


퇴사 다음날이자 졸업식, 김은 태연하게 출근하는 척 평소 출근하는 시간에 출근을 했다. 김은 퇴사 사실을 집에 알려야 하나 고민을 했지만 밝히지 않기로 했다. 막상 퇴사를 했지만 계획 따위 없다. 어느 회사든 갈 수 있다는 자신감 대신 내가 과연 쓸모 있을 거라는 의심과 함께한 퇴사였다. 김은 자신이 도망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도망친 사람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는다. 그러므로 집에도 말할 수 없고, 학교에도 갈 수 없다. 김은 일단 학교로 가기로 한다. 늘 타던 지하철인데, 오늘은 반대 방향 열차를 탄다. 오늘 할 일이 있다는 사실에 김은 안도한다. 졸업식에는 가지 않지만, 졸업장은 받아오는 게 오늘의 계획이다.


"녹차라떼 한 잔 주문하신 분, 녹차라떼 한 잔 나왔습니다."


김은 학교 후문에 있는, 24시간 운영하는 카페로 간다. 김은 평소에 카페에 가서 작업을 하지 않는다. 집에서 모든 작업을 하는 김에게, 혼자 카페에 오는 건 낯선 일이다. 누군가를 기다리느라 카페에 먼저 와있던 적은 있지만, 온전하게 혼자의 시간을 쓰기 위해 카페에 온 건 처음이나 다름없다. 학생 때도 동기들과 오지 않는 이상 잘 지 않는 카페에 혼자 오게 되었다. 오전 시간인데도 제법 사람이 많다. 다들 어떤 사정으로 온 지 알 수 없지만, 학생들이 많은 것 같다. 오늘 졸업장을 받으면, 김은 더 이상 학생이라는 신분을 사용할 수 없다. 


김은 4학년에 취업을 했고, 남들보다 늦게 입학한 대학보다 시작해서 모든 면에서 남들보다 늦은 삶에서 취업은 그래도 너무 늦지 않았다고 믿었다. 그러나 1년 만에 퇴사를 하면서 다시 원점으로 늦어졌다. 김에게 원점이란 '모든 게 늦은 사람'이다. 유쾌하지 않은 수식어를 자신의 것이라고 믿는 건 서글픈 일이다. 울고 있을 수는 없으므로, 유난히 쓴 맛이 강한 녹차라떼를 마시면서 노트북으로 채용 공고를 본다. 


선배부터 후배까지, 김은 주변 사람들의 졸업식에 매년 꾸준하게 참석해왔다. 정작 자신이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굳이 가족이나 친구가 자신을 축하하기 위해 온다는 게 낯간지럽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잘 살고 있다면 졸업식에 참석하게 되지 않을까. 김은 막연하게 그 정도로 생각했다. 애석하게도 좋은 소식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지금 당장 김에게 살면서 행복했던 순간을 뽑아 보라고 해도 열 손가락을 다 채우기가 힘들 거다. 


"이번에 졸업식 가?"


김은 PC 카톡으로 이미 졸업을 한 동기가 어제 보낸 메시지를 뒤늦게 확인한 척 답을 보낸다. 퇴사를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는 동기였다. PC 카톡으로 여러 카톡창들을 살핀다. 어려움을 하소연한 카톡보다는 태연하고 괜찮은 척 한 카톡이 대부분이다. 징징대는 것보다는 숨기는 게 낫다고, 김은 늘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 김의 성향이 타인을 당황시킬 때도 있다. 타인에게 감정을 고백하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걸, 김은 알면서도 실행하지 않았다. 


채용 공고를 살핀다. 김은 '가고 싶은 회사'보다 '나를 받아줄 만한 회사'를 찾는다. 오랜만에 자소서를 다시 쓴다. 금세 다 마셔버린 녹차라떼의 거품처럼, 김은 자신이 해 온 일을 부풀리고 과장해서 적어본다. 한 시간 뒤에 다시 보면 지우게 될 만큼 추상적인 말들이다. 이룬 게 많은 사람이면 거품을 일으킬 필요도 없이 자신의 본질을 적으면 될 일이었다. 김은 과연 자신의 다음 스텝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지만, 당장 몇 시간 뒤에 졸업장을 받으러 가는 자신의 모습도 상상하기 힘들었다.


어디든 빨리 이직을 해야겠다는 조급함 덕분인지, 채용 공고 몇 개를 스크랩하고 자소서 초안을 쓰고 나니 바깥에서 학사모를 쓴 이들을 포함한 인파들이 보였다. 김은 졸업식에 참석했을 이들이 모두 졸업을 기념해서 식당에 들어갔을 시간쯤에 학과 사무실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이들의 숫자를 세어본다. 스무 명쯤 된다. 저들이 시야에서 모두 사라지면, 그때쯤 나가겠다고 마음먹는다. 김은 가족들과 학교 근처에서 식사를 해본 적이 없다. 만약에 이 근처에 왔다면 무엇을 먹었을까. 학생 때는 가서도 자장면만 먹고 나오던 중식집에 가서 비싼 요리를 주문해서 먹었을까. 


김은 노트북을 챙기고 학교로 간다. 혹시라도 아는 후배들을 마주칠까 걱정한다.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는 물음 앞에서 뻔뻔하게 잘 지내는 척할 자신은 있지만, 대화가 끝난 뒤 입 안에 가득 맺히는 텁텁함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인적이 드문 골목을 지나 학교에 도착한다. 


김의 예상과 달리 학교에는 사람이 많다. 삶에서 한번뿐인 졸업식인데 오래 머물고 싶을 거다. 가족이 지방에서 올라온 경우도 많을 거다. 김은 선배, 동기, 후배들의 졸업식에서 졸업자들의 가족사진을 찍어줄 때가 많았다. 한번뿐이니 최대한 열심히 찍어줘야겠다는 마음이었다. 한번뿐인 졸업식을 참석하지 않은 것도 나름의 운치가 있다고, 누구도 김에게 눈치 주지 않지만 혼자서 계속해서 되뇌었다.


"졸업장 받으러 왔는데요."


학과 사무실에는 학생회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있다. 다행히도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 이름을 말하고 졸업장이 쌓인 박스를 본다. 졸업식에 참석 안 한 이들이 꽤 되는 것 같다. 김은 졸업장을 받아 들고 인사를 한 뒤 나온다.


"선배님, 졸업 축하드려요!"


예의상 한 말이겠지만, 김이 오늘 처음으로 들은 축하의 말이다.


김은 다시 후문으로 향한다. 아직 퇴근 시간까지는 시간이 남았다. 일단 근처 밥집에서 밥을 먹는다. 졸업식 이후라 어딜 가도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아서, 한 정거장 정도를 걸어가서 딱 봐도 사람이 없어 보이는 가게에서 밥을 먹는다. 국밥을 마시듯이 먹은 뒤, 다시 카페로 향한다. 오전에 있었던 카페와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다른 카페로. 


"너무 오랜만이다."


김은 아는 얼굴을 마주친다. 김의 동기 '지'였다. 며칠 전에 확인한 졸업자 명단에 자신과 함께 유일하게 이름을 올린 동기였다. 지가 졸업식에 왔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김은 자신이 퇴사하고 졸업장만 받으러 왔다고 했고, 지는 일을 하다가 잠깐 졸업장만 받으러 온 거라고 했다. 김과 지는 간단하게 서로의 근황을 나눈 뒤, 각자의 노트북에 집중했다. 서로의 화면에 어떤 풍경이 펼쳐지는지 알 수 없다. 그저 서로의 가방에 졸업장이 있다는 사실만 알 뿐.


"다녀왔어요."


김은 집에 도착해서 졸업장을 책장에 끼워둔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장에 이어 대학교 졸업장이 생겼다. 김의 어머니는 아직도 미련이 남았는지 졸업식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김은 나중에 가서 졸업장을 받아올 거라고 말을 하고 방으로 들어간다.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도, 김은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자신이 싫다고 느낀다. 퇴사할 당시에 부모님한테 감추면 나중에는 더 말하기 힘들 거라는 동료의 말이 떠올랐다.


회사를 그만뒀고, 학교를 졸업했다. 회사에서 도망쳤고, 학교에서도 나왔다. 김은 지갑에서 명함과 학생증을 뺀다. 이제 김에게 남은 신분과 소속이 없다. 대학교 4학년이자 신입사원이었던 김은 이제 졸업 후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이 되었다. 김은 내일도 출근시간에 맞춰 출근하는 척 밖을 나갈 것이기에, 일찍 자기로 한다. 내일은 어느 동네로 가야 할까. 김은 자신의 도망이 생각보다 근사하지 못하는 사실에 실망하며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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