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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 Jan 10. 2021

전국 수염인들의 애로사항 체험하기

방치한 사이 잔뜩 자란 수염

수염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 수염이 없으면 오히려 어색하겠다 싶을 만큼 잘 어울리는 이들이 있다. 물론 수염이 있든 없든 멋진 사람도 있다. 


나는 수염이 어울리지 않는다. 애석하게도 수염이 빨리 자라는 편이라, 수염과 함께할 때가 많다. 수염을 기르려고 의도한 적이 없는데, 수염이 빨리 자라서 방치가 곧 무성한 수염으로 이어진다는 게 안타깝다. 스스럼없이 만날 수 있는 친구들은 2~3일 정도 방치한 나의 수염을 목격하곤 한다. 마스크를 쓰는 요즘은 가릴 수 있어서 다행이다.


지난 주말에 병원에 다녀온 뒤로 밖에 1분도 나가지 않았다. 밖에 눈이 오고 난리였다는 뉴스를 보았다. 뉴스에서만 보았지 체감하지 못했다. 집에 있던 사람들도 밖에 나가서 눈사람을 만들어서 SNS에 올리던데 내게는 그런 낭만과 체력이 남아있지 않다. 퇴근길에 눈 때문에 혼란스러웠다는데, 그걸 피했다는 것에 안도할 뿐이다.


외출이 없으므로 면도를 안 했다. 면도를 하면 피를 보는 경우도 많기에, 가뜩이나 안 좋은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면도를 안 한다. 즉, 외출이 없으면 면도를 안 하고, 수염이 빨리 자라므로 수염이 가득한 얼굴이 된다. 이 글을 쓰는 이유도, 거울 속 내 수염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평생 길러도 갖기 힘든 양의 수염이 일주일 만에 나버리다니. 


아프지 않은 수염 영구제모가 생긴다면 반드시 하고 싶다. 피부과에 갔다가 수염 제모의 고통을 체험판으로 경험한 적이 있는데, 사람이 아파서 혼절할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너무 아프면 웃음이 나온다는 것도 알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완전 영구적인 제모도 아닌 듯해서, 언젠가 아프지 않은 수염 영구제모가 나오기를 기다려본다.


수염의 양은 풍부하지만, 모양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아름다운 모양의 수염이었다면 감탄하면서 길렀겠지만, 기른다고 하더라도 '길렀다'가 아니라 '방치했구나'로 느껴질 만한 모양을 자랑한다. 누군가 나를 만들 때 수염의 양만 주었을 뿐, 아름다움은 주지 않았다. 먹을 때도 맛보다 양에 초점을 맞춘 나의 기질은 수염에서 나온 걸까.


다음 출근일 때까지는 면도를 하지 않을 거다. 집에서 국물이 있는 요리나 요플레를 먹다가 수염에 그것들이 살짝 묻어나는 걸 느낄 때면, 전국 수염인들의 애로사항이 느껴진다. 나의 수염이 가진 유일한 순기능이란, 전 세계 수염인들의 마음을 알아간다느 것뿐이다. 해외 수염인들은 국내 수염인들과 사정이 다르려나.


만약에 하루도 빠짐없이 완전한 재택근무가 이뤄진다면, 나의 수염은 어디까지 자랄 수 있을까. 다리털과 마찬가지로 일정 길이 이상으로는 자라지 않는 것 같은데, 다리털만큼 오래 방치해본 적이 없으므로 알 수 없다. 이렇게 계속해서 집에만 있다면, 365일 중에 수염이 있는 날이 더 길 것 같다. 그렇게 되면 나는 수염인이 되는 건가. 나는 나를 수염인이라고 밝혀야 하나. 수염 때문에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는 새해다.


*커버 이미지 : 빈센트 반 고흐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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