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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 Jan 17. 2021

지구의 종말이 온다면, 하던 일 해야지

종말이 언제 올지 알 수 없으므로, 일상을 유지하기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A는 스피노자가 했다고 알려진 말을 떠올렸다. 스피노자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도 몰랐고, 썩 알고 싶은 마음도 없다. 왜냐하면 출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분명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건데, 왜 출근하면 할 일이 생기는 걸까. 


스피노자는 철학자인 걸로 알고 있다. 혹시 가난한 철학자였을까. 그래서 부업으로 사과나무를 키우던 게 아닐까. 아니면 주업이 사과나무를 기르는 거고, 부업이 철학자인데 후대에 와서 그의 철학이 유명해진 걸까. 이런 류의 상상을 하면서 집을 나왔다.


A는 종말이 자신에게 너무 과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말은 말 그대로 모두 죽는 게 아닌가. 모두들 죽어 버리면, 죽음을 기억해줄 이가 없다. 어차피 자신의 죽음을 기억해줄 사람도 얼마 없겠지만, 그래도 한 명이라도 기억해주는 이가 있는 게 낫겠다고 A는 생각한다. 종말 전에는 뉴스부터 SNS까지 난리가 나겠지만, 종말 이후는 조용할 거다. 종말은 바퀴벌레와 쥐까지 사라지게 하는 것일까. 


죽는 사람 입장에서는 죽음은 종말이나 다름없다. 혼자 죽는다고 하더라도 작은 회사의 사원인 자신은 죽어봐야 회사 게시판 정도에만 올라올 거고, 신문 부고 란에도 올라오지 못할 거다. 내일이 없고, 출근도 없다. 죽기 전에는 '살려주면 출근도 열심히 할게요'라고 말하게 될까. A는 출근길에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뉴스를 보는 것보다 이런 류의 상상을 하는 게 더 건강하다고 믿는다.


이런 상상의 끝은 억울함으로 끝난다. 만약에 회사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죽기라도 하면, 나의 종말이 찾아오는 거다. 종말 전에 사과나무는커녕 회사 이메일 답장 보낼 생각이나 하고 있어야 하다니. 죽지 않을 거라는 확신은 어디서 오는 오만일까. 


A는 자존감도 자신감도 무엇 하나 자기 안에서 제대로 자라지 못했지만, 죽지 않을 거라는 알 수 없는 확신은 거대한 사과나무처럼 무럭무럭 자랐다는 생각을 한다. 그 덕에 꾸역꾸역 출근은 하지만, 성과는 좀처럼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 


스피노자처럼 이름을 알릴 수도 없을 거고, 죽을 날짜도 알지 못하겠지만, 내일 출근을 할 거라는 건 알고 있다. 하던 일을 하다가 죽게 될 거다. 성실해서가 아니라, 딱히 다른 방도가 없으므로. 죽는 순간까지도 일 생각을 했다고 알려지면, 회사 게시판 부고란에 댓글들은 볼만하려나. 댓글에 사과 이모티콘을 다는 직원은 경위서를 쓰게 될까. 오늘도 종말을 면하고, 하던 일을 한다. 



*커버 이미지 : 구스타프 클림트 - 사과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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