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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 Jan 29. 2021

야식을 즐기지 못하는 이유

밤 9시에 무엇인가를 먹는 일

강박이 많은 편이다. 정리에 대한 부분일 수도 있고, 시간에 대한 부분일 수도 있다. 여러 강박을 가지고 있고, 강박적으로 바라보는 그 부분이 잘 해결이 안 되면 꽤나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살수록 강박이 줄어들 줄 알았으나 오히려 더 견고 해지는 기분이다. 


살 또한 내가 가진 강박 중 하나이다. 늘 살이 쪘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야식은 어딘가에 놀러 가거나 거절 못한 상황이 아닌 이상은 자발적으로 택하지 않는다. 저녁 6시 이후로는 아무것도 안 먹는 게, 나의 오래된 강박이다. 


그러나 최근 며칠 동안은 거의 8시에서 9시에 무엇인가를 먹었다. 피부과에서 받은 항생제 때문이다. 하루 3번 밥을 먹고 먹으라는 말을 들은 후부터 강박에 시달린다. 8시간 간격으로 먹는 게 베스트이겠지만, 현실적인 애로사항이 많아서 6시간 간격으로 먹기로 한다. 9시부터 재택근무가 시작이지만, 약 시간을 맞추기 위해 굳이 7시 알람을 맞춘다. 그러나 항생제의 잠 기운에다가 피로까지 더해져서 8시 30분에야 아침을 먹는다. 6시간 뒤면 2시 30분이고, 거기서 6시간 뒤면 8시 30분이다. 결국 그래서 오늘 9시에 무엇인가를 먹었다.


밥을 먹고 항생제를 시간 맞춰 먹어야 한다는 강박과 늦은 시간에 무엇인가 먹으면 안 된다는 강박이 싸운다. 그러나 건강이 우선이므로 전자가 승리한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면 다시 이런 일이 안 생길 텐데, 9시에 무엇인가 먹고 소화도 안 된 채 잠들기도 싫다. 독한 약이라 그런지, 삶은 계란 두 개를 먹고 나서 먹으니 속이 쓰렸다. 그 이후로는 제법 든든하게 먹어서 그런지 금세 살이 찌는 기분이다. 건강해지고 나서도 살찐 내 모습을 보면 스트레스를 받을 텐데.


먹는 건 언제나 즐겁다. 특히나 늦은 시간에 무엇을 먹는 건 내 삶에 좀처럼 나타나지 않기에, 즐겁다. 만끽하면 좋겠지만 너무 오랜만에 벌어지는 일이라 즐기기는 쉽지 않다. 항생제가 몸 안에 깃든 걱정도 죽인다면 좋겠으나, 걱정은 항생제 따위로 지워질 게 아니다. 


이제 항생제는 몇 개 안 남았다. 이렇게 늦게 약을 핑계로 무엇인가 먹는 것도 내일이면 끝이다. 내일은 최대한 일찍 저녁을 먹고 싶은데, 그러려면 일찍 자야만 한다. 항생제 때문에 졸리기는 하지만, 여전히 배가 부르다. 어차피 찔 살이라면 잠이라도 더 자는 게 나으려나. 


항생제가 끝나면, 야식도 없을 거지만, 강박은 끝나지 않을 거다. 강박을 녹이려면 얼마나 독한 항생제가 필요할까.



*커버 이미지 : 페르난도 보테로 '산에서의 소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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