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결 가능한 불안만 품고 살기
알 수 없는 불안에 시달린다. 이유라도 알면 고칠 텐데, 원인 불명이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을 적용해보면 어떻겠냐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학교 다닐 때 프로이트 책 좀 열심히 읽을 걸. 아무도 시키지 않았으나 치열하게 걱정하고 불안해한다. 어릴 적부터 앓았던 아토피처럼, 이건 타고난 나의 성질인 걸까.
독립하고 나서도 불안은 계속되었다. 분명 혼자 있는 집임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이 벌컥 내 방 문을 열던 기억 때문인지 집 문을 누가 열 것만 같다. 잠자리가 바뀌어도 잘 자는 편이지만, 며칠간은 잠을 설쳤다. 짐을 줄이려고 집에서 책도 거의 안 가져왔는데, 불안은 들고 온 걸까.
최근 들어서는 비교적 불안이 줄었음을 느낀다. 걱정을 만들고 키우는 일은 어릴 적부터 특기였는데, 걱정의 대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내가 품은 불안의 종류란 이렇다. 분명 회사를 잘 다니고 있는데, 회사에서 내가 지금 이렇게 일하는 게 맞나, 뭔가 더 해야 하나 같은 불안. 친구들과 잘 지내다가도 연락이 안 되면 내가 뭔가 잘못했나 걱정하는 것. 막연한 종류의 걱정으로 불안을 만들고, 막상 알고 보면 별 거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이런 류의 불안은 계속된다.
최근 들어서는 걱정하는 것들이 비교적 선명해졌다. 예를 들면 외출 전에 집에 있는 멀티탭 전원들을 껐는지, 가스밸브는 잠그었는지, 보일러 온수 버튼은 껐는지 같은 것들. 집의 하나부터 열까지 챙기다 보니 이런 류의 걱정들이 늘었다.
이러한 걱정들의 장점이라면 불안을 해결하는 방법이 명확하다는 거다. 외출 전에 한번 더 확인하고, 이미 밖에 나왔다면 집에 들어가서 확인하면 된다. 만약에 보일러 온수 버튼을 누른 채 펄펄 끓는 보일러를 방치하고 나왔어도, 집에 와서 온수 버튼을 끄는 순간 그것은 해결된다. 마치 내 마음의 불안의 버튼을 끄는 기분으로, 버튼을 꺼본다. 그렇게 마음에 있는 불안의 리스트들을 하나하나 종료한다.
불안은 인간이 평생 품고 가는 종류의 감정이라는 건 정신과 의사가 아니어도 알 수 있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늘 품고 왔으니까. 어쩌면 매일 자정이 넘는 순간 불안의 할당량이 주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딱히 걱정거리가 없음에도 불안을 품는 이유는, 불안하지 않은 삶이 익숙하지 않아서일까. 오히려 불안하지 않으면, 불안하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불안해하는 이상한 마음.
어차피 품어야 할 불안이라면, 해결 가능한 것들로 할당량을 채우는 게 이득이다. 집에 쓰레기봉투는 남았는지, 여분의 휴지가 남았는지, 빨래 바구니에 빨래가 얼마나 찼는지 등, 내가 독립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해야 할 걱정들로 리스트를 가득 채워본다. 무사히 이것들을 해내고 나서 얻는 작은 성취감들은 덤이다. 매일 걱정을 하지만 그것이 해결 가능하고, 성취감까지 얻을 수 있다는 건 내가 머무는 작은 집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선순환의 사이클이다.
여전히 마음 안에 풀리지 않는 막연한 불안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불안이 우선순위에서 저 멀리로 보낼 만큼, 집에서의 삶은 쉴 틈 없이 전개된다. 늘 해야 할 것들이 넘쳐나니까. 직접 내 손과 발로 해결할 수 있는 것들로 가득하다. 몸으로 해결 가능한 작은 불안들을 만들고 해결해나간다. 내게 필요한 건 막연한 불안이 헤집고 들어올 편한 환경이 아니라, 몸을 움직일 만한 바쁜 환경이었다. 이보다 더 생산적일 수는 없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보다 덜 불안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걸 보니, 내가 지금 굴리는 일상의 쳇바퀴가 제법 마음에 드는 것 같다. 오늘도 보이지도 않는 미래 대신 당장 해결 가능한 불안을 품고 쳇바퀴를 굴려본다.
*커버 이미지 : Edvard Munch 'Anxie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