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김치 인간이 여름에게 보내는 푹 익은 고소장
난 푹익은 파김치다. 여름이면 항상 그렇다. 푹 익어서 싱싱한 파의 형태는 없어지고 쪼글쪼글한 파김치, 한번 먹으면 오랫동안 입안에서 존재감을 나타내는 그것. 에너지 뿜뿜 하는 생생한 인간으로 있을 수 없다. 푹 절어서 땀냄새 날까 봐 걱정이 되는 나는, 시들어버린 파도 아니고 푹 익은 파김치가 맞다.
옷은 얇아지지만 오히려 겨울보다 나 자신의 존재감을 더 느끼는 여름이다. 땀, 냄새, 개기름, 불쾌지수. 이 모든 게 내가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고 느끼게 해 준다. 아주 불쾌한 쪽으로. 여름은 나에게 재앙이다.
특히 올해 여름이 더 그렇다. 작년에는 없던 외근이라는 업무가 추가되어 고문을 받고 있다. 이 땡볕에, 자차도 없는 뚜벅이는 땀에 절여진다.
잘 자고 일어나 생생한 파가 되어봤자 금방 소금에 절여지는 상황이 찾아온다. 발효도 아주 빠르게 이루어진다. 외근하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면 이미 쉬어 꼬부라져있다. 난 안 익은 파김치를 좋아하는데. 항상 내가 싫어하는 익은 파김치의 모습으로 퇴근한다. 모든 것이 푹 절여진 채로.
그래, 나만 절여지는 게 아니다. 내 옷도 같이 절여진다. 땀이 극도로 없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다들 아는 사실이다.
검정이나 흰색이 아닌 다른 색의 옷들은
‘이곳이 내 땀이오’
하고 대형 광고를 하고 있다는 것을.
그 사실을 인식한 후로 여름에는 검은색이나 흰색 상의만을 주로 고집했다. 하지만 올해는 상황이 또 다르다. 내가 투잡을 뛰면서 검정옷의 치명적인 단점을 알게 됐다. 투잡을 뛰고 집으로 돌아와서 옷을 벗고 경악을 했다.
“이게 뭐야!!”
등판에 핀 하얀 꽃. 아니, 하얀 소금 결정체들이 나를 반겼다. 땀을 오죽 많이 흘렸으면. 내 염분들이 검정옷에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쪽팔림이 순식간에 나를 덮쳤다. 누가 봤나? 아오..
이제 나에게 남은 건 흰색 옷 밖에 없다. 여름은 나에게 왜 이렇게 많은 것을 빼앗아 가는 걸까. 티셔츠 색도 염분도 사회적 체면도 모두 다 가져가 버린다.
올여름의 나는 백의민족이 되었고, 축축하고 미끌미끌한 파김치도 되었다. 인생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지만 그래도 너무한 것 같다. 여름은 진짜 나에게 가혹하다.
그 원망의 마음을 담아 고소장을 작성해 봤다. 실제로 고소할 수 없지만 그래도 여름헤이터로 한번 얘기를 해보고 싶었다. 여름만 되면 매번 가을이 오기를 기다린다.
안 그래도 투잡으로 힘든데, 여름은 나를 과하게 작동시킨다. 염분 배출 MAX, 개기름 배출 MAX. 과부하걸린 노동자의 투정이다. 그만 익고 싶다. 언젠가 익을 김치가 아닌, 원재료 상태 그대로인 나로 살고 싶다. 내 존재감이 있는 그대로 발산되는 그런 계절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다른 계절이 오면 고소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단언컨대 그렇다. 난 여름만 싫을 뿐이다. 여름을 제외하면 다음 계절이 빨리 왔으면 하고 바라지 않는다. 가을이라고 빨리 겨울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가을이면 가을이구나, 겨울이면 겨울이구나’ 하고 즐긴다. 다만 겨울은 빨리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봄이 오면 여름은 금방이니까.
나의 혐오하는 여름아.
나는 너에게만 유독 박해지는 거지
내가 마냥 그런 사람은 아니야.
너도 너 나름의 좋은 점이 있기는 해.
네가 있기에 내가 좋아하는 초록색이 가득해지는 거겠지.
그래도 조금은 멀어지면 좋겠다.
나를 만난다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거야.
축축하고 미끌미끌한 인간.
나도 나를 피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