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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초 Aug 20. 2023

정신의학과에 전화를 걸었다



정신의학과에 전화를 걸었다. 그것도 다섯 번이나. 수년의 망설임 끝에 드디어 내원 결심이 섰는데 나만 빼고 다들 부지런히 정신과를 다니고 있었는지 예약이 11월, 12월까지 꽉 차있다고 했다. 재진의 경우는 예약 없이 당일 진료도 되지만 초진은 꼭 예약을 해야 한단다. 정신과... 여러 의미로 참 가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과 약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가 약을 먹을 정도는 아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고. 겨우 이런 걸로 정신과를 찾았다고 의사가 웃으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도 당연히 들었다. 한 번도 넘어보지 않은 문턱이라 그 문 너머에서 어떤 대화가 오가는지, 어느 정도가 정신과를 찾아도 되는 수준인지 모든 게 미지수였다.


내과나 신경외과 의사처럼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라고 물으면 난 뭐라고 대답해? 이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오른 순간부터 마음이 무거워졌다. 콕 집어 한마디로 설명할 수도, 그렇다고 구구절절 하나씩 전부 풀어 이야기할 수도 없을 테니까. 몇 커뮤니티에 정신과 첫 내원에 대한 글을 쓰고 얻은 팁은, 종이에 적어 가라는 것이었다. '증상 위주'와 '상황 위주'로 구분 지어서. 이야기를 세심하게 들어주는 의사도 있고, 증상에 관심을 더 두는 의사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은 나도 적어 봤다.


호흡 관련 증상(증상이 나타난 건 3일 전쯤): 심장이 너무 빨리 뜀, 숨이 잘 안 쉬어짐, 숨을 아무리 깊게 들이마셔도 한참 모자란 느낌이 들고 가슴이 답답함.
약으로 조절하고 싶은 증상: 감정 기복, 무기력, 생각이 너무 많아서 잠을 잘 못 잠.
느끼는 감정: 사람들과 섞여있기 싫음, 모든 연결을 끊어 버리고 도망가고 싶음, 일평생 나아지지 않는 상황에 놓여있는 게 허탈하고 인생이 무의미하게 느껴짐, 차라리 기절해 버리거나 이 세상에서 아예 사라져 버리면 편하겠다는 생각이 예전보다 더 자주 들고 있음(이런 생각은 10대 후반부터 계속해왔다).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내 흔적을 지우고 싶음(실제로 직장에서 내 사물함을 비우고 이름표를 뗐다).
행동 문제: 마음에 안 드는 상황 또는 갈등이 생기면 입을 다물어 버리는데 억지로 말을 안 한다기보다 나도 모르게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됨, 우울할 땐 누군가에게 질문을 받고도 대답을 안 하는데 의도적으로 소위 말하는 '씹는'게 아니라 대답이 마음속에서만 되고 입 밖으로 안 나옴. 화낼 대상이 전혀 아님에도 엉뚱한 사람에게 화풀이를 함(대놓고 화를 내는 방식이 아닌 입을 다물어 버리고, 행동이 거칠어진다), 그 순간 마음속으로는 내가 왜 이 사람한테 짜증을 내지? 왜 이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지?라는 생각이 들고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인지하면서도 그 순간에 감정을 조절할 수가 없음, 후회하는 감정이 곧장 드는데도 그 사람에게 사과해서 바로잡지 않고 몇 주씩이나 그냥 그 상태로 흘러가게 내버려 둠, 일을 가지 않는 날엔 아침 10시에 일어나서 오후 4시까지 침대에 있음(누워서 뭐 재밌는 걸 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침대를 벗어날 수가 없다), 모든 사람이 내 눈치를 봄.


음, A4 용지에 프린트해서 가져가야 할 것 같다. 증상 위주 또는 상황 위주라는 게 분명하지 않아 이렇게 쓰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렇게 써놓으니 정말 가관이다. 7년을 한 곳에서 일하면서 몇 번이나 사장님과 면담했다. 예민한 성격을 고치라고. 사장인 나까지 네 눈치를 보는 게 정상적인 상황이냐고. 엄마도 동생도 내 기분을 살핀다. 한 가지 답답한 건, 나도 내 기분이 왜 그렇게까지 엉망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보통은 이유가 없다. 나에게만 매일 뭣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눈을 떠서 출근했을 뿐인데 어느 날은 괜찮고 어느 날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한계까지 부푼 풍선이 되어있다. 감사하고 또 죄송하게도 사장님은 아직도 날 해고하지 않으셨다. 거의 1년에 한 번씩 하는 면담(유일하게 나만 하는)에서 사장님은 항상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나쁜 애가 아니란 걸 아니까 내가 널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거야. 평상시에 넌 정말 좋은 직원이고 동생들에게 재밌고 편한 언니잖아. 그런데 가끔 너도 어쩔 수 없는 어마어마한 감정에 파묻히는 거잖아. 그걸 조절할 힘도 없고. 내가 널 앉혀놓고 이렇게 말을 해도 너는 말을 안 해. 다른 사람들은 변명이라도 하는데 넌 그냥 듣고 수긍하고 인정하잖아. 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마음인지를 모르는 게 답답해.' 성격을 고치라는 말을 이곳에만 들은 건 아니었다. 20대 초반에 2년 반 정도 일했던 마트에서도 사장님에게 그 소리를 들었다. 그것도 송별회 회식자리에서. 그땐 지금보다 더 어리숙해서 그 말이 억울했지만 이젠 이해가 된다. 그래, 난 좀 고쳐야 돼. 그래서 여러 책도 보고 강연도 찾아 듣는데, 명상도 하고 일기도 쓰는데 완전히 새사람이 되기는 힘들어. '다른 사람은 당신의 감정을 알 의무가 없다.'라는 어느 책의 구절을 매일 되뇌며 6개월 조용히 잘 지내다가도 한계에 다다른 어느 날 한 번 삐끗하면 또 면담을 하게 되는 게 이젠 좀 지쳐. 내가 노력을 안 하는 사람이면 덜 힘들까. 그냥 사회에 나와서 사람들과 섞여 살면 안 되는 사람인 걸까. 반성의 결론은 언제나 자기혐오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나의 성격적 결함이, 혹은 정신적 문제가 자랑이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서다. 초진도 당일 진료가 가능하다는 병원을 알게 되어 이틀 뒤 그곳에 내원할 예정이다. 의사 입에서 '당신은 정신과 약을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성격이 나쁜 거예요.'라고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되지만, 어쨌든 내가 왜 이런지 설명해 줄 사람에게 한 번쯤은 가 보고 싶다. 전문가의 말을 듣고, 감사하게도 약으로 뭔가 조절할 수 있는 거라면 적극적으로 복용할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와 이 사람 성격 진짜 뭣 같다.'라고 생각하셨다면, 마지막 변명 한 번만 들어주시라. 주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만큼 나도 마음이 불편하다. 안하무인으로 내 멋대로 구는 게 아니라 내가 나를 컨트롤하기가 어렵고, 그 타이밍을 계속 놓치는 기분이다. 내가 나를 누를 타이밍을. 날 좋아해 주는 동료들과 자나 깨나 내 걱정뿐인 엄마와 동생을 불편하고 불쾌하게 만들어서 내가 얻는 건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또 이래버렸다'는 죄책감과 자기혐오, 불편함과 후회가 몇 배로 날 힘들게 한다.


사람들은 다 쉽게 하는 걸 나는 왜 못할까. 기분이 별로여도 웃으면서 인사하는 것, 사는 게 힘들어서 다 관두고 싶어도 상대방에게 먼저 안부를 묻는 것. 이 사람은 좋고, 저 사람은 싫다는 생각이 들어도 겉으로는 두루두루 잘 지내는 것. 그릇을 깼을 때 내 인생은 왜 모양일까?라고 생각하는 대신 안 다쳐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 나는 이런 것들을 잘하고 싶다. 더 이상 내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기도 싫고 나 자신을 괴롭게 하기도 싫다. 부디 이틀 내에 정신과에 가기로 한 마음이 사그라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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