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4월이다. 1년의 3분의 1이 벌써 지나갔다. 올해 1월 1일 열정에 (활활) 불타며 올해엔 더 알차게 그리고 빡세게 시간을 보내자던 다짐이 무색하게 나는 그새 가장 나다운 나로 돌아와 있었다. 새로운 다이어리에 큼지막하게 적었던 말은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되자"인데, 어째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보다 변한 게 하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꿈에 대한 로망이 있다. 정확히는 꿈꾸는 삶에 대한 동경이다. 꿈을 위해 나아가는 사람들도 선망한다. 문득 요새 내가 썼던 영화 리뷰들을 들춰보니 하나같이 꿈, 현실, 이상, 주체성과 같은 비슷한 맥락의 주제로 영화를 바라봤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한결같기도 하지..
이렇게 매일 꿈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을 꿈꾸는 나인데, 정작 나의 일편단심 짝사랑의 대상인 꿈 여정 속 스스로를 돌아보며 드는 생각은 자꾸만 제자리에 맴도는 느낌, 다음 단계가 아닌 출발선에서 어물쩡대는 느낌이다.
"대체 나는 왜 그럴까?"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참 많이 던졌다. 그냥 '안 해서' 그런 거라며 자신을 탓하는 자조적인 결론을 내기도 하고, 공을 들여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의 장기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무튼 나는 나름대로의 고민을 통해 가장 가능성 있는 원인을 계획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능력, 즉 '실행력'이 부족해서라고 간주했다.
그래서 나는 실행력을 늘리기 위해 올해 다이어리에 '성취율 페이지'를 만들었다. 매일매일 할 것들을 '미래를 위해 해야만 하는 것', '나를 위한 개인적인 것들'로 나누어 리스트로 작성하고, 투두 리스트 체크하듯이 그 날 계획한 할 일들 중 한 것들을 체크한다. 그리고 그 체크한 것들을 매일 퍼센트로 환산하고, 다시 주 단위로 평균을 내어 '성취율 페이지'에 기록한다.
내가 '성취율 페이지'를 만들어 기록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계획한 것을 얼마나 해내는지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고, 그걸 통해 스스로를 위한 자극으로 삼을 셈이었다. 그런데 실행력을 높이기 위해 만든 이 성취율 페이지는 의도치 않게 꿈여정에서 어물쩡 대는 내 모습의 새로운 원인을 알려주었다.
그건 바로 '지속성'이었다.
나에게 부족한 건 실행력 이전에 지속성이었던 것이다. 너무 뻔한 말 아니냐 하겠지만 나에게는 복잡한 머릿속에 시원한 물을 끼얹는 듯한 깨달음이었다.
나는 내가 꿈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서 자꾸 실패하는 이유가 나에게 무언가를 해내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출발도 못하고 자꾸만 출발선에서 어물쩡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성취율 페이지에 나타난 과거의 나의 모습은 생각보다 '잘' 무언가를 해냈다. 심지어 무언가를 해낼수록 나의 성취율은 올라갔다. 나는 능력이 없지도 출발을 못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성취율 페이지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기록이 아예 없는 구간) 기간에 나는 내가 세운 여정 계획 중 첫 단계를 끝내고 보상심리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문제는 '일시정지'버튼을 누르고 휴식을 취하려 했던 내가 사실 '정지'버튼을 눌렀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나는 나의 목표와, 내가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맘속에서 잃어버렸다.
결국 다시 정신을 차리고 여정을 시작하려 했을 때, 나의 몸은 애써 적응한 이 여정을 다시 낯선 것으로 받아들였다. 영상을 보다 정지 버튼을 누르면 처음부터 다시 봐야 하는 것처럼, 다시 이어질 줄 알았던 나의 여정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여정으로 다시 돌아간 나의 성취율은 끊기지 전 성취율에 비해 반토막이 나있었다. 쉽게 원상 복귀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걸 보고서야 깨달았다.
나는 출발을 못한 게 아니라,
계속해서 길을 잃었다는 것을.
과거의 내 꿈여정 실패들을 돌아봤다. 모든 게 연결이 되었다. 길을 잃은 이유는 제각각이었다. 새로운 관심사가 생긴다거나, 스케줄상으로 빡빡했거나, 열심히 달리다 보상심리로 쉬기도 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런 다양한 이유들로 나는, 항상, 처음의 목표를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길을 잃어버렸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항상 나 자신에 대한 불신감, 좌절감, 무력감이었다.
보통 꿈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은 장거리 마라톤이다. 장거리 마라톤의 끝이 꼭 1등으로 이어지진 않지만, 적어도 장거리 마라톤의 골인지점에 다다른 사람들은 중도 포기한 사람들과 격이 다른 성취감을 얻는다. 자신의 마라톤 여정을 돌아볼 수도, 하나의 마라톤을 완주한 사람이기에 다음 마라톤을 조금 더 쉽게 준비할 수도 있다.
꿈여정도 마찬가지다. 꿈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은 정말 길지만, 꼭 그 끝이 내가 출발선에서 원했던 성공, 혹은 꿈이 아니더라도 그 여정 자체가 우리의 인생에 주는 영향력은 긍정적이고 강하다. 그 여정을 통해 성장하고, 그래도 끝까지 간 사람이기에 가질 수 있는 단단함과 여유를 얻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장거리 마라톤인 꿈여정을 꿈꾸며, 다양한 노선의 단거리 달리기만 연이어 뛰었던 것이다.
여기서 인상 깊은 점은 단거리라고 쉬운 것은 아니라는 거다. 똑같이 힘들다. 무의미하지도 않다. 나는 달렸으니깐.
하지만 인생은 RPG 게임 캐릭터처럼 한번 레벨업 시키면 몇 개월이고 유지되는 게 아니다. A 노선에서 단거리 달리기를 하고 다음은 B에서 그다음은 C에서 달리고 나서, 다시 A로 돌아왔을 때 A-2 노선으로 나아갈 것 같지만 내 다리는 A 노선을 잊었다. 그저 머리가 기억할 뿐이다.
"내가 달렸던 노선이다"라고. 그뿐이다.
여기저기 노선에서 단거리 달리기를 하며 시간은 시간대로 체력은 체력대로 다 쓰고 지쳐서 돌아보니 고작 '단거리'만큼 온, 심지어 그 새 새로운 단거리 달리기를 시작하려는 자신을 보며, 출발도 못한다며, 달릴 수 없는 거 아니냐며 스스로를 자책한다. 그러면서 마라톤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동경한다.
이게 나였다.
이 사실을 깨닫고 처음에는 약간의 충격을 받았고 그다음에는 안심이 되었다. 그렇게 무언가를 향해 출발도 못한다며,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것 아니냐며 자책했는데, 나는 나아갈 수 없는 사람이 아니었고, 내가 달려온 것도 무의미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길을 잃지 않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이 사실이 얼마나 안심이 되던지.
나는 달릴 수 없는 게 아니라 그저 마라톤에 익숙하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뒤돌아보니, 여태 나의 성과를 뒷받침해온 것은 다 나의 단거리 달리기들 뿐이었다. 기한이 정해져 있는 시험, 조별과제, 리포트, 벼락치기 공부 같은 것들. 근 몇 년 동안 스스로에게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계속해서 느꼈다. 이제야 그 변화가 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이제는 단거리가 아닌 마라톤을 뛰어야 하는 거다. 이게 내 인생을 한 단계 나아가게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의지를 가진다고 처음부터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휴식이 필요할 때도 있을 것이다. 다만 앞으로 나는 그럴 때마다 나의 능력을 탓하며 자책하기보다, '적어도'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오늘 몇 걸음 아니 한 걸음도 못나아가도 내가 긴 여정 중이라는 사실을, 내가 가야 할 골인지점을 잊지 않을 것이다.
마라톤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건 바로 '지구력'이다. 꿈을 향한 여정이라는 마라톤에서 지구력은 단순히 안 쉬고 뛰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잃지 않는 것'이다.
또다시 길을 잃으려 하는 미래의 나에게 이 말을 꼭 남기고 싶다.
오늘 아무것도 못할 수 있어,
하지만 길만 잃지 마
writer 심록원
문화예술플랫폼 '아트인사이트'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