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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탈서울 Dec 17. 2020

서울이 싫어서


왜 탈서울 하고 싶냐 물으면 한 가지로 답을 못하겠다. 일, 집, 생활환경... 서울은 전체적으로 모든 게 만족도가 떨어진달까. 먹고사는 취직 자리가 서울에밖에 없으니 하는 수 없이 서울에 붙어있지만 다른 지역에서 일을 구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새 터전을 찾고 싶은 게 요즘 내 마음이다.


얼마 전 탈서울의 간절함을 다시 한번 느낀 적이 있었다. 귀하디 귀한 휴일 아침, 아직 잠자리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누워있는데 집 바로 건너편에서 공사를 시작했다. 아침 8시인데 포클레인으로 땅을 파고 아주 난리가 났다. 보통 사람이라면 도저히 안 되겠다 하고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겠지만, 나처럼 아침잠 많고 오전에 멍 때리는 스타일은 다르다. 이불속을 포기 못한 채 귀를 막고 그대로 한두 시간 누워있었다. 휴일 아침 따뜻한 이불속은 정녕 포기할 수 없는 궁극의 소중함이다. 공사 소리가 싫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렇게 귀를 막고 이불속에서 지난 주말 아침을 보냈다. 온몸으로 집 건너편 공사장 소음을 흡수하고 말았다.


예고가 없었던 건 아니다. 지난주 어느 날 퇴근하고 돌아왔더니 두루마리 휴지 16개가 들어있는 큰 꾸러미가 우리집 출입문 앞에 놓여있었다. 신기한 건 같은 건물 같은 층 옆집 문 앞에도 같은 선물이 놓여있었다. 이게 뭐지 자세히 보니, 쪽지가 붙어있었다. "내년 7월까지 00건물 공사 예정이오니 소음 발생 양해 바랍니다." 

올 것이 왔구나 생각했다. 1년 반 전 지금 사는 집을 계약할 때, 이 집에 살던 신혼부부가 한 말이 떠올랐다. 살면서 불편한 점은 없었냐 물으니 "주변에 공사 소음이 조금 힘들었지만, 이제 공사가 다 끝나서 상관없을 거예요." 그렇다, 이 주변은 원래 공사가 많은 동네였던 것이다. 오래된 빨간 벽돌 빌라가 많은 동네니 30년 된 건물을 부수고 새 건물이 들어서는 일도 잦았다. 내가 사는 건물만 빼고 앞,뒤,옆집이 차례로 공사를 이어가고 있었고, 내가 들어온 1년 반 동안 큰 공사가 뜸했던 게 오히려 의외의 일이었다.


서울을 벗어난다고 공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시시때때로 뒤죽박죽 공사를 겪는 고통+좁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고통+별로 좋지도 않은 집에 상상 초월한 가격을 부담하는 고통을 느낄 빈도가 서울보다는 낮아질 것이다. 이 동네에 이사 온 날, 근처에 있는 오래된 아파트를 보았다. 저렇게 낡은 건물에는 누가 사는 걸까, 1971년에 지은 50년 된 아파트다. 어처구니없게도 그 아파트의 매매가는 8억 원대였고 1년 사이 지금은 더 올라있다. 내 근로소득으로는 평생 도달할 수 없는 가격이다. 50년 된 낡은 아파트의 가격은 내가 서울에서 열심히 살 의욕을 완전히 잃어버린 여러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질 낮은 주거 상황+도달할 수 없는 주택 가격+근로소득의 낮은 가치+근로 의욕 저하...


이번 휴가 때 정읍에 와서 진지하게 주택 가격을 검색해봤다. 8년 간 성실히 직장을 다니며 모은 돈으로 어느 정도 터전을 마련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지은 지 10년 이내의 30평대 아파트는 2억대였다. 지은 지 20년쯤 된 구축 아파트는 1억 원대였고 그보다 못 미치기도 했다. 충분히 근로의욕을 돋우는 가격대였다. 열심히 일하고 모아서 도달할 수 있는 희망이 보였다. 전세가는 지금 모은 돈으로도 충분했다. 25년 된 아파트도 지금은 구축이라지만 내가 어릴 적 새 아파트라며 선망했던 집들이라 지금 들어가 살아도 만족도가 높을 거 같다. 워낙 서울에서 지옥고+원룸+구옥 빌라에 오래 살았던 터였다.  아무리 아파트가 천편일률적인 몰 건축미의 상징이라 해도, 지금 한국의 도시에서 아파트만큼 제 몫을 성실히 하는 건축물도 없을 거다. 


이제 일자리다. 역시 진지하게 30대 중반 여성이 진입할 수 있는 일자리를 검색해봤다. 있을 리가 없지. 지금 종사하는 업종을 완전히 버린다고 해도 없고, 경력으로 연관시킨다고 해도 없다. 그냥 없다. 취업으로는 없다. 귀농이나 자영업, 1인 크리에이터, 근무지의 제약이 없는 프리랜서를 하는 큰 전환이 필요하다. 서울에서는 집이 없고 집이 있는 곳에선 소득이 없네. 정읍에서 살려면 굶어야 한다.


"정읍 귀농귀촌 어때?"(나)

"은퇴하고 나서는 괜찮지."(애인)


어쩌면 탈서울의 소망은 내가 일자리를 잃게 되는 큰 외부 충격(이를테면 해고 같은)이 있지 않는 한 이번 생에 이루기 힘든 목표일 수 있겠다. 가능하더라도 할머니가 되어서 이루게 되지 않을까. 아직은 머나먼 꿈이다.



어제 첫 눈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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