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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을 멈춘 지 10개월, 무직자로 맞이한 노동절

리스본에서 끄적인 노동에 대한 단상

by 이구름

Episode 10.


노동의 공백

20대의 나는 아주 막연하게, 일을 통해 효능감을 느끼고, 사회적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으며, 돈도 잘 벌고, 사회적으로도 인정받는 폼 나는 인생을 살고 싶었다. 하하. 그리고 지금 노동을 멈춘 지 어느덧 10개월이 되었다. 살기 위해 멈췄다. 그리고 그중 3개월은 연고 없는 땅에서 이 도시, 저 도시 자유롭게 떠돌며 이 시국에 외화를 쓰며 보냈다. 이전보다 더 나은 삶을 꾸려가고자 택한 시간이었다. 나는 이 시간 동안 뭔가 번뜩이는 삶의 정답을 찾기를 바랐던 것 같다. 뒷일은 미래의 내게 맡기고 무작정 떠난 이 여행이 계속되며 나의 잔고는 계속 줄어들고 있다. 여행 어딘가 즈음에는, 문득 이 모든 과정이 단순한 현실 도피가 아니라는 증명이 스스로 필요하기도 했다. 이렇게 등 뒤에 거북이처럼 잔뜩 짐을 짊어지고 자유롭게 움직이며 사는 삶이 나와 생각보다 잘 맞는 것 같은데, 앞으로 어떻게 밥 벌어먹으며 살지 뭐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사실 내 계획과는 달리,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저 쏟아지는 이베리아 반도의 태양 아래서, 햇볕을 즐기는 법을 깨달았을 뿐이다.

머나먼 땅을 자유로이 방랑하는 여행자로서의 시간은 야속하게도 쏜살같이 지나갔다.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 점점 다가올수록, 나는 나의 현실적인 생존 방향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생존은 소득과, 소득은 현재로서는 그 방식과 형태가 어떻든 간에 노동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노동하는 삶에 대한 복잡한 마음

의미를 잃어버린 기계적인 수단으로써의 도구적 노동은 인간을 황폐하게 만들지만, 한편으로 노동 없는 삶은 인생의 의미를 묻게 만드는 것 같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동안 내가 자라며 지켜봐 온 노동이라는 것은, 일종의 계급 사회의 신분을 결정짓는 결정적 요소였다. 내가 어떤 가치를 제공할 수 있느냐에 따라 노동 시장에서 내 가치를 평가받고, 임금을 부여받고, 때로는 정규직/비정규직, 혹은 풀타임/파트타임으로 규정된다. 그리고 그렇게 부여받은 일종의 신분은 사회 속에서 나의 계급을 결정하고, 이러한 계급은 어떤 사회에 내가 속해 있느냐에 따라 다양한 사회적 시선과 차별 혹은 우위를 경험하게 한다. 따지고 보면, 어려서부터 대부분의 대한민국 아이들에게 주입되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 ’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는 훗날 좋은 직업을 얻어, 돈을 잘 벌든, 사회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바지 하든, 이 사회에서 좋은 계급장을 얻기를 바라는 부모의 바람이 담겨있던 것 같다.

수능 합격을 위해 기도하는 수험생 학부모들의 모습 @이데일리

20대의 나는 노동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고 싶었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것만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일을 통한 자아실현… 중학생 때 학교에서 이 같은 개념을 배웠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 것 같다. 그리고 교육제도권 하의 12년 동안, 매 년, 매 학기 학교에서 장래희망을 써서 내야 했다. ‘일을 통한 자아실현’이라는 개념이 어디엔가 내 안에 뿌리 박혀 있어서인지, 언제부턴가 매 학기 장래희망을 써서 내야 할 때마다 나는 매번 고통스러웠다. 뭘 택해야 할지 도통 잘 모르겠는데, 그렇다고 아무거나 적어내고 대충 살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그놈의 ‘훌륭한 사람’이 되고는 싶은데, 나중에 내가 뭘 진짜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어서 일단 눈앞의 공부를 열심히 하는 그런 학생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어차피 내 인생에서 많은 부분을 일하는 데 써야 한다면, 그 시간이 충분히 의미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사실 아직도 이런 마음을 품은 채 그저 나 혼자 제자리에 멈춰있다고 느껴질 때마다, 복잡한 감정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친구들은 차곡차곡 연차가 쌓여가고, 일찌감찌 방향을 정해 이제 커리어도 탄탄대로, 누구는 연봉이 얼마래, 누구는 누구랑 결혼을 했고, 누구는 신혼집이 서울 어디에 몇 평짜리 아파트래, 누구는 지금까지 몇 억을 모았대, 누구는 투자로 얼마를 벌었대, 누구는 이직하며 연봉을 얼마로 올렸대, 누구는 회사 다니면서도 사이드 프로젝트로 커리어도 쌓고 부수익도 창출하고 자기 계발도 한대, 누구는 사업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대, … 하는 세상의 소음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 갑자기 덜컥 조급해지고 숨이 막힌다.

마치 인사이드 아웃의 <불안이> 처럼.

내가 또 나 혼자 현실 물정 다 제쳐두고 지금 진지하게 이런 고민을 할 때인가, 일을 통한 자아실현이라는 거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진짜 가능한 일인가, 일단 뭐든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해나가며 이러한 생각을 놓지 않는 것이 현명한 것 아닐까, 이 모든 고민들이 그저 참으로 배 따시고 복에 겹구나 하다가도, 내게 주어진 이 생을 그저 생존이라는 숙제처럼 살다 가기 싫어서, 그 소란한 소용돌이 속에서 그저 나도 뒤처지지 않기 위해 정신없이 살다 가기 싫어서, 이러한 고민을 할 수 있는 여력은 나의 윗세대들이 피나는 노력으로 만들어준 다음 세대를 위한 책무다, 뭐 그런 생각으로 이 시간을 조금만 더 버텨본다. 버틴다고 뭐가 나올지는 모르겠으나,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 보는 거다. 이쯤 되면 노동의 숭고함이라는 것이 문명의 지배 계급이 만들어낸 환상일까 싶은 생각도 든다. ‘어떻게 해서든 그럴싸한 ‘이유’를 쥐어주면, 어쨌거나 무소처럼 성실히 일할 나 같은 미래의 일꾼을 위해서 누군가 만들어 낸 거 아냐?’ 하는 생각이 들자, 학창 시절 배웠던 청교도의 노동 윤리와 같은 개념들이 머릿속 어딘가에서 튀어나왔다. 노동에 대한 복잡한 생각들이 두서없이 혼란스러워지는 지점에 도달하자, 노동의 정의에서부터 머릿속을 정돈해야겠구나 싶었다.


‘노동’의 개념은 시대적으로 다양한 맥락 속에서, 또 여러 가지 관점에서 들여다볼 수 있다. 크게 [1] 사전적 정의로 대변되는 일반적인 관점, [2] 경제학적 관점, [3] 마르크스주의 관점, [4] 사회학적 관점, [5] 철학적 관점으로 나누어 가볍게만 살펴보았다. 개념적으로 파고들면 끝도 없이 길어지고 깊어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저 지금으로서 내 삶에서 나의 ‘노동’을 어떻게 바라보며 살아갈 것인지, 그 방향성을 정리하는데 밑천이 될 정도로만 정리해 보련다. 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일하며 살 것인가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전개하기 위해서, 이러한 과정이 다시금 필요했다.



노동이란 무엇인가

[1] 일반적 관점

우리가 ‘노동’하면 떠올릴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일반적 정의로서 노동은, 인간이 ‘생존’이나 ‘목적 달성’을 위해 신체적, 정신적으로 수행하는 활동이다. 기본적으로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해서 육체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를 말한다.


[2] 경제학적 관점

경제학적 관점에서 노동은 ’생산요소‘ 중 하나로, 개인이 ’임금‘이라는 대가를 받고 제공하는 노동력을 의미한다. 신고전학파를 중심으로 한 현대 경제학에서 ‘노동’은 재화, 서비스를 생산하기 위한 수단으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에 공급하는 경제적 행위자’로 본다. 이 관점에서 노동력은 시장에서 하나의 상품처럼 거래되며, 노동 시장에서의 임금은 노동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된다. 즉 임금은 노동이라는 자원의 희소성과 생산성에 따라 형성되는 가격으로 이해되며, 노동과 임금의 교환은 자발적이고 공정한 시장 거래로 여겨진다.


[3] 마르크스주의적 관점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노동이란 인간의 본질적인 활동으로, 자기 실현과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삶의 방식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은 상품화되고,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판매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본가가 노동력을 구매한 뒤, 노동자를 통해 가치 이상을 생산하도록 요구한다고 보았다. 노동자는 자신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만큼의 임금만을 받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며, 이 차액을 ‘잉여가치’라고 부른다. 이 잉여가치를 자본가가 가져감으로써 자본주의의 이윤이 발생한다. 결과적으로, 노동자는 자신이 만든 상품에 대한 소유권도 없고, 생산 과정에서도 통제권을 가지지 못한다. 이로 인해 노동은 더 이상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소외되고 도구화되는 과정이 된다. 이는 마르크스의 ’노동소외’의 핵심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렇게 생존 자체가 투쟁이 되는 ‘구조’를 문제 삼으며, 노동 조건 개선, 생산 수단의 사회화, 계급 해방과 같은 구조적 변화를 제안한다.

작년에 일 그만두고서 자본주의에 신물이 나서 슬쩍 들여다봤던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4] 사회학적 관점

사회학적 관점에서 노동은 단순한 경제 활동을 넘어, 개인의 사회적 지위를 형성하고, 정체성과 계층을 결정짓는 주요한 사회적 행위다. 노동은 단지 생계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개인이 누구인지를 규정하고 타인과 구별되며 사회적 관계망 속에 위치 지어지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임금 또한 단순한 ‘노동의 대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임금은 경제적 교환가치일 뿐 아니라, 사회적 의미와 권력관계가 반영된 사회적 현상이다. 사회학자들은 ‘임금’을 단지 시장 메커니즘의 결과로 보지 않고, 사회 구조 속에서 재생산되는 ‘불평등의 상징적 증거’로 본다. 예를 들어, 뇌수술을 하는 의사나 고난도 프로그래머는 높은 수준의 전문성과 숙련도를 요구하는 직업으로, 일반적으로 해당 분야의 인력이 부족하고 사회적 수요도 높기 때문에 높은 임금을 받는다. 이러한 설명은 경제학적 관점에서 ‘희소성의 법칙’에 부합한다. 그러나 사회학적 관점에서는 이러한 ‘희소성’ 자체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결과라는 것에 주목한다. 특정 기술이나 전문성이 ‘희소’해진 건 교육 기회의 불균등, 사회적 네트워크의 차이, 성별과 인종에 따른 제약, 계층 간 격차 등 사회 구조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높은 임금은 단지 개인의 능력과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어떤 사회적 조건 속에서, 누가 그 능력을 획득할 수 있었는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5] 철학적 관점

철학적 관점에서 노동은 단순한 생계 수단이나 생산 활동을 넘어, 인간 존재와 삶의 본질에 깊이 연결된 활동으로 이해된다. 일부 철학자들은 노동을 인간의 자율성과 창조성을 실현하는 고귀한 행위로 보며, 노동을 통해 인간은 자기 자신과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본다. 반면, 근대 이후에는 반복적이고 강제된 노동이 인간을 도구화하고, 타인이나 구조에 예속시키는 소외의 원천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어 왔다. 노동이 인간의 자아실현의 수단이자, 억압과 소외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이러한 양면적 시각은 마르크스주의에서의 노동 개념과 일정한 맥락을 공유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이 소외되고 착취당하는 ‘구조적 문제’에 초점을 둔다. 반면 철학적 관점은 노동의 구조적 조건보다 ‘노동이 인간 삶에서 갖는 의미 그 자체’에 주목한다.

한나 아렌트가 본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활동

예컨대 한나아렌트는 ‘노동’을 조금 다른 시각으로 조망한다. <인간의 조건>에 의하면, 한나아렌트는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활동을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로 구분했다. ’노동‘은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활동이다. ’작업‘은 보다 영속적인 세계를 만드는 활동을 의미한다. 도구, 기술, 예술품, 제도 등을 만들며 자연을 넘어서 인간만의 세계를 구성한다. 노동보다 높은 차원의 활동으로 인간 존재의 창조적 능력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행위‘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회, 정치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자신의 정체성과 자유를 드러내는 행위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궁극의 활동이다. 이는 개인의 고유함을 세상에 드러내는 방식이며, 한나아렌트에게 가장 고귀하고 인간다운 활동이다. 한나 아렌트에게 노동은 인간의 자유를 실현하기보다는 생존의 굴레에 종속시키는 낮은 차원의 활동이다.

한나 아렌트는 ‘돈을 버는 노동’이 인간 존재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특히 현대 사회가 모든 인간 활동을 노동 중심으로 재편한 것—즉, 사람이 ‘살기 위해 일하고, 일하기 위해 산다‘는 사고방식—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페인을 여행하며, 내가 만났던 많은 스페인 사람들이 내게 해주었던 이야기가 있다. ‘We don’t live to work, but work to live’ ‘너네는 일하기 위해 살지, 우리는 살기 위해 일해’. 이는 생존과 노동의 관계를 단순히 일과 삶의 균형 차원에서 바라본 것이다. 그런데 한나 아렌트의 관점에 따르면, 아예 이 프레임 밖에서 생각해 볼 여지가 생긴다. 생존은 중요하지만, 인간다움은 생존을 넘어서는 활동 속에서 실현되기 때문이다.


사실 깊게 파고들면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질 이 개념에 대한 논의를 너무나 단편적으로 가볍게 다뤘다. 어떠한 정의 하나가 옳고 그르다의 관점이 아니라, ‘노동’이라는 것이 다차원적인 이해가 필요한 복합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어쩐지 무언가를 창작하며 살고 싶은 사람으로서, 또 자아실현이라는 환상일지 모르는 그 희망을 품고 사는 사람으로서, 그중에서도 한나아렌트의 관점을 좀 더 들여다보고 싶었다.



생존을 넘어 ‘행위’로서의 밥벌이

나는 어차피 인생에서 내 일정 부분의 시간을 생계를 위한 소득을 위해 할애해야 한다면, ‘행위자’로서 생계를 벌어먹으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살아있는 동안 내가 속한 공동체에 뭔가 보탬이 될만한 의미 있는 것을 창조해 내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해왔다. 한나아렌트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적, 정치적 이념과 메시지를 사회에 던지는 예술작품을 창작함으로써 그 작품을 팔아 생계를 위한 돈을 벌면 그것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훨씬 고차원적인 작업이자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고객에게 채택을 받아야만 하는 자본주의 속에서, 자유로운 예술이 정말 가능할까? 한나아렌트는 예술가가 노동자나 생산자가 아니라 행위자로서 서는 순간에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예술가는 자신의 창작이 단순히 노동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예컨대, 단지 감상용 오브제나 투자 상품이 아니라, 사회와 연결되고 이야기되는 행위로써의 ‘공공성‘을 포기하지 않는 창작을 해야 한다. 예술가가 단지 작품을 만드는 ‘기술자’가 아니라 정치적 주체로서 사회에 말을 거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노동자’가 아니라, ‘그림을 통해 말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또한, 경제논리로부터 상대적 거리를 두는 노력이 필요하다. 완전히 자본주의 바깥으로 나가긴 어렵지만, 팔리는가가 아닌 ‘말할 가치가 있는가’를 중심에 둘 때, 고차원적인 인간다운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한 번 달성되고 나면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행위자로서 살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궁구해야 할 기준이 된다.


그러나 팔려야 한다

자, 이제 나는 하나의 의문에 직면하게 된다. 세상에는 수도 없이 많은 ’말할 가치가 있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러나 수많은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콘텐츠들이 넘쳐 나는 가운데, 모든 이야기들이 주목받기란 참으로 어렵다. 특히나 지금의 시대는, 한나아렌트가 미처 예측하지 못했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광장에 나가 외치면 사람들이 듣던 시대에서, 공공광장이 점점 축소되며 그 자리를 디지털 플랫폼이 대신하고 있다. 무엇을 창작하느냐를 넘어서, 어떻게 창작하느냐, 그리고 어떻게 사람들에게 닿게 할 것이냐까지가 더 중요해졌다. 이것이 ‘행위’의 본질을 흐리는가? 하는 질문이 내게 주어졌다.

세상에 아무리 좋은 작품을 내놓아도, 아무에게도 알릴 수 없다면 그것은 이 세상에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 아닌가?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어쩌면 마케팅 없이는 아무에게도 닿지 않는, 현실적으로는 ‘비존재’에 가까운 상태에 우리의 메시지 및 창작물이 머무르게 되는 새로운 현대적 조건이 만들어지고 있다. 다시 물음을 던지며 생각해 본다. 이것이 ‘행위’의 본질을 흐리는가?


단순 소비를 위한 마케팅은 노동일 수 있지만, 진실된 말이 더 멀리 퍼지기 위한 전략이라면 행위의 확장이 될 수도 있다. 아무에게도 닿지 않는 메시지일지라도 여전히 의미는 있지만, 오늘날 그 의미는 ‘도달력’과 분리될 수 없기에, 현실적 영향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마케팅을 동반한 전략적 행동이 필요하다. 아무도 안 들어도 외치는 건 그 자체로 ‘행위’로서 의미가 있지만, 들을 수 있게 외치는 건 더 ‘강력한 행위’이다. 우리는 팔리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창작자의 과제는 ‘팔릴 수 있을 만큼 전략적이되, 팔려도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



말할 가치가 있는 이야기를 찾아서

노동절 리스본 한 공원에서 끄적인 나의 노동에 대한 개똥철학

인간에게 ‘노동’은 참으로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다. 다만, 내 삶에서 어떤 의미를 주요한 방향으로 채택하고, 어떤 관점으로 나의 노동을, 내 삶의 활동들을 영위해 나갈 것이냐가 관건이다. 아무래도 나는 한나아렌트의 ‘행위(Action)’의 개념에 부합하는 활동을 하며 살고 싶다. 그러한 활동을 통해, 경제적 관점에서도 충분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생산해 생계를 영위하고 싶다. ‘행위자’로서의 밥벌이를 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연결되고 말할 가치가 있는 것에 관해 창작하고, 실제로 사람들에게 도달될 수 있도록 전략적이면서, 때로는 경제 논리로부터 의도적인 거리를 두며 조절하는 균형의 미학을 겸비해야 한다. 참으로 추상적이면서 쉽지도 않군. 하하. 내가 세상에 던질 수 있는 ‘말할 가치가 있는 이야기’란 무엇일까. 감히 나 따위가 그런 것을 가지고 있나 싶다가도, 나니까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분명 한 개쯤은 있을 거라는 용기를 가져본다.


초등학생 때부터 어른들 말 잘 듣는 평범한 모범생으로 살아온 90년대생 K-장녀. 학창 시절 내내 시험이 끝나면, 늘 전교 석차, 학급 석차가 적인 꼬리표를 받아 들던 우리 세대. 꼬리표를 받아 들던 우리는 마치 우리 인생에도 꼬리표가 있는 것처럼 살고 있는 것 같다. 남들만치 수능 공부도 했고, 대학 입학 후에는 공모전이니 사이드프로젝트니 뭐니 나름 열심히 했다. 뭣도 모르면서 청춘 하나를 담보로 창업도 해보고, 월 억대 매출도 찍어보고, 얼마나 부족한지도 깨닫고, 사람으로부터 왕창 깨져도 보고, 다시 물음표를 지닌 채 딱히 가진 것 없이 서른 살이 되어 인생의 한 복판에 멈춰 섰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정처 없이 표류하고 있다.

어느 날은 스페인 작은 마을 길을 따라 걷고, 걷고, 또 걷다가 산 정상에서 냅다 드러누웠다. 새까매진 흰 신발만큼이나 자유로워졌다.


K-드라마에 환장하는 나의 스페인 친구 나디아 덕에, 최근 인기 몰이를 한 ‘폭삭 속았수다’를 함께 보았다. 드라마에서 엿본 우리의 윗 세대의 치열한 생존을 떠올리면, 그들의 노동 앞에서 그저 겸허해진다. 이런 고민할 여유도 없이 일궈온 그들의 그늘 덕분에 다음 세대의 내가 이런 고민도 할 수 있게 된 거라고 생각했다. 경제 성장에 발맞춰 다른 차원의 성숙이 필요한 때라고 느낀다. 우리의 부모 세대가 나에게 다음 세상을 물려주었듯이, 내게도 우리의 다음 세대를 위한 고민들을 해야 할 어느 정도의 책임감을 정말로 느낀다.


삶에 정답과 점수 같은 건 없다고, 느려도 괜찮다고, 남들과 다르게 가도 괜찮다고, 돈이 전부가 아니라고, 행복과 연민, 사랑, 공감, 호기심과 같은 감정들을 느끼며 사는 삶의 가치 같은 것들에 대해 말하고 싶다. 사실 그런 이야기를 누군가 지금의 내게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도 잘 사는 모습을 누군가 내게 보여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그런 사람이 누군가에게 되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노동을 향한 나의 시선이

정답이 아님을 기억하기

어쩌다 보니 나는 복에 겨워, 내 삶의 노동과 활동에 대해서 세월 좋게 고민해 볼 여유 같은 것이 있도록 태어났다. 운이 좋게,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사지 멀쩡하게 태어나, 부모님의 보살핌 하에 삼시 세끼 챙겨 먹으며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에서 나고 자랐다. 내가 가진 약간의 결핍들은 마침내 나를 더 단단하게 해 주었고, 당연하게 보이는 것들에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호기심을 가질 수 있는 인간으로 자라게 해 주었다. 나는 아닌 척, 고고한 척 살아왔지만,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사회적 계급과 지위, 임금과 같은 개념들이 무의식적으로 내가 ’노동‘을 바라보는 가장 주요한 프레임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비단 내 자신을 바라볼 때뿐 아니라 타인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노동을 하느냐, 어떤 활동을 하며 살아가느냐가 한 사람의 정체성에 많은 영향을 주기는 하지만, 언제나 그것이 누군가의 모든 걸 설명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한다. 한 사람이 처한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개인사적 맥락에서 따라 결정되는 많은 것들이 있다. 그 어떠한 것도 나의 오만한 잣대로 판단할 권리 같은 것이 내게는 없다는 생각을 덧붙여본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비 쫄딱 맞고 본 무지개. 삶은 어쨌거나 찬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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