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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여정 그 자체야

여행의 끝, 그리고 새로운 여정은 이미 시작되었어

by 이구름

Episode 11.


여행의 끝자락에 다가서다


포르투갈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바르셀로나에서 거의 5월 한 달 가까이 나디아의 쉐어하우스에서 지냈다. 그녀도 한국에서의 한 달간의 여행을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시점이었다. 다시 돌아온 바르셀로나에서의 한 달은, 여행이라기보다 집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대단히 특별할 것은 없지만, 충만한 하루들을 살았다. 건강하게 먹고, 친구와 일상의 순간들을 공유하고, 자연 속에서 날씨의 기쁨을 누리고, 걷고, 뛰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 어쩐지 이 기간 동안에는 글보다 그림을 더 많이 그렸던 것 같다.


바르셀로나에서의 나날들


여행을 마무리할 시점이 점점 다가왔다. 막연하게 '돌아가기 싫다'는 감정이 앞섰다. 돌아가면 마주하고 싶지 않은 녹록하지 않은 현실이 그저 내 앞에 닥쳐있을 것만 같았다. 어느덧 공백기가 일 년을 다가서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이 여행은 마치 그 공백기를 탈출하는 마지막 여정이어야 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여행을 보내며 많은 생각들을 하고 많은 감정들을 느꼈지만, 여전히 명확하게 내가 어딜 향해 나아가야겠다 하는 뚜렷한 답안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그땐 몰랐다. 그러나 분명히 뭔가 어렴풋한 힌트와 시그널들은 내 안에 맴돌고 있었다.


즐거운 나디아 가족과의 식사 / 집 앞 5분 거리의 해변을 많이 즐겼다. /티비다보 정상에서 내려다본 바르셀로나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는 벨기에 브뤼셀이었다. 처음 비행기 표를 살 때, 왠지 유럽 북부 쪽으로 out티켓을 사놓지 않으면, 끝까지 관성처럼 이베리아 반도 안에서만 머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 별생각 없이 택한 행선지였다. 원래는 벨기에 주변의 다른 나라도 좀 더 여행하다가 입국할 생각이었는데, 바르셀로나에 머무르면서 생각이 바뀌어, 바르셀로나에서 나디아와 나디아의 가족들과 최대한 오랜 시간을 보내고, 입국 이틀 전 벨기에 브뤼셀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다. 나에게 온 마음을 활짝 열어주고 환대해 준 나디아와 그녀의 가족들, 그리고 고마운 룸메이트들 덕분에 그들의 더없이 소중한 일상에 함께할 수 있었다. 그 마음들에 대한 보답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사실 어느 순간부터 함께 지내는 것이 너무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워졌지만, 생각해 보면 생판 모르는 지구 반대편의 이방인에게 나누어준 이 모든 것들이 정말 말도 안 되는 고맙고 감사한 일이었다. 그것을 잊지 말고 내가 전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보답을 해야겠다, 또 나 또한 내가 받은 이러한 친절과 환대를 누군가에게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생각했다.


이 모든 여정을 처음 시작했던 바르셀로나는 늦겨울 찬 바람에 여전히 코 끝이 시리던 3월이었다. 두툼한 외투를 모두 내려놓고, 여름이 다가오고 있음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5월의 끝자락에서 이곳을 다시 한번 떠난다. 3월에 바르셀로나를 떠나 스페인의 다른 도시로 향하던 때와는 기분이 묘하게 달랐다. 그때는 떠나면서도 어쨌거나 금방 다시 오게 될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면, 다시 스페인에 오기까지 또 많은 준비가 필요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곳에 다시 꼭 돌아와야겠다는, 그리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겠다는 그런 알 수 없는 감각 같은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꽤 오랜 시간을 넉넉하고 편안한 친구와 가족의 품에서 지내다가, 벨기에서 이틀 정도의 시간을 홀로 보내며 이 90일간의 긴 여행의 정말 끝을 향해가고 있었다. 나는 이 무렵 그런 결심을 마음속으로 했던 것 같다. 이 여행이 끝난다고 해서, 이 모든 게 마치 한 여름밤의 꿈처럼 그저 '좋았지...'하고 떠올릴 이야기로 끝나게 하지 않겠다. 마치 긴 꿈에서 깬 것처럼,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여행을 가기 이전과 똑같은 상태로, 똑같은 고민을 하고, 똑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는 나로 되돌아가게 두지 않겠다. 이 여정을 통해 내가 느끼고 생각한 것들이 실제 내 삶에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고 움직이게 만들겠다. 그래서 반드시 이 여행을 발판 삼아 내가 택할 수 있는 다른 세계로 건너가겠다고 다짐했다. 내 앞에 놓인, 내가 이제 앞으로 풀어야 할 문제와 상황들은 똑같겠지만, 그걸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는 내 의지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여행을 하며 나는 좋은 영감과 생각들을 많이 얻었다. 그리고 잃어버렸던 나의 그리운 모습들을 온전히 되찾았다. 그리고 과거의 일들을 더 객관적이고 선명하게 느낄 수 있게 되었고, 그 상처 중 일부가 내게 여전히 어떤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지도 발견했다. 온전한 회복의 길로 들어섰다고 느꼈다. 이제 이 동력을 가지고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바르셀로나를 떠나던 날 공항에서. 둘이 눈물을 흘렸다..ㅋㅋㅋ 날 데려다준 나디아의 귀여운 마지막 인사


떠날 때.. 내가 줄 건 없고... 나디아와 친구들, 나디아 부모님에게 그림을 선물로 주고 왔다. 액자에 걸어뒀다고 사진을 보내왔다.




웰컴 백 투 코리아,

그리고 여행에서 얻은 기회의 시그널


상하이 경유를 거쳐 한국으로 90일 만에 돌아왔다. 힘든 줄도 몰랐는데, 막상 집으로 돌아오니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한국에 돌아와 한 5일간은 침대에 밖을 나가기가 싫었다. 뭔가를 할 기운이 안 났다. 솔직히 말해서, 뭔가 움직이고 시작하기 두려웠던 것 같다. 막상 돌아오니, 내 앞에 놓인 현실 앞에서 뭔가를 시작한다는 게 너무 막막하고 거대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5일 째되던 날, 그냥 생각을 멈추고 집 밖에 나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의 꼬리가 길어지기 전에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인천 공항에 상륙... 웰컴백!


이 전의 커리어를 살려 오피스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물론 해왔던 일들이 즐겁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지만, 좀 다른 길을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왕 이렇게 트랙 밖으로 벗어난 거, 아예 제대로 나만의 길을 개척하며 살아가고 싶었다. 한국에 뿌리 박힌 관습과 전형성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상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삶을 택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건사할 수 있는 토대를, 내가 가장 즐겁게 할 수 있고, 잘할 수 있고, 세상이 원하는 것의 교차점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나의 숙제였다. 나는 여행을 하며 지속적으로 느껴온 기회의 시그널들을 되짚었다. 이상하게 알 수 없는 직감이 계속해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여기에 뭔가가 있다고.


스페인, 포르투갈, 벨기에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이곳 유럽과 라틴 문화권 사람들이 한국에 얼마나 많은 관심과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온몸으로 느꼈다. 8년 전 유럽에 여행 왔을 때랑은 뭔가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바르셀로나를 포함해서 스페인 곳곳의 큰 도시들과 리스본에서 현지 친구들과 방문했던 한식당들, 그곳에서 본 다른 현지인들, 심지어 짧게 체류한 벨기에에서조차 한국에서 왔다고 했을 때 보이는 호의적인 관심과 태도들, 한식, K드라마에 대한 열정 등을 체감했다. 8년 전에 친구와 짧은 유럽 여행을 왔었을 때만 해도, 한국이라고 하면 북한을 먼저 떠올리거나 별로 큰 관심 자체가 없었는데, 지금은 확연히 달랐다. K팝의 물꼬를 튼 오빤 강남스타일, 그리고 BTS, 오징어 게임을 넘어서서, 나도 모르는 K 드라마들, 그리고 한국인들 사이에서 고전으로 통하는 우리나라 영화들에 열광하는 수많은 현지인들을 만났다. K 컬처의 힘을 확연히 느꼈다. 포르투갈을 여행할 때도, 그냥 길에서 혼자 걸어 다니면 한국에서 왔냐며 한국을 좋아한다고 먼저 관심을 가지며 말 걸어오는 현지인들도 더러 있었다.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과 수요는 높은데, 현지에서 그에 상응하는 적극적으로 팔로우할 공급원의 선발주자가 아직 없는 느낌이었다. 여기서 뭔가 매우 강력한 기회의 에너지를 느꼈다.


20-30년 전 스페인에서 일본 문화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고 현지에서 그 수요와 시장이 급격하게 확장되어왔다고 한다. 지금은 일본 문화와 관련된 대형 페어가 바르셀로나와 같은 큰 도시에서 매년 열릴 정도로, 이미 J컬처에 대한 시장이 이곳에 잘 자리 잡았다. 스페인 어딜 가나 스시집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는데, 예전에는 이렇게 날로 생선을 먹는 문화 자체가 없었다고 한다. 지금은 여행을 하며 고급화된 스시 전문점부터 저렴한 스시 판매점까지 다양한 선택지들이 현지인들에게 엄청난 사랑받고 있었다. 이게 다 몇 십 년 만에 일어난 일이다. 그와 함께 일본 여행 수요도 함께 굉장히 커져서, 한 때 엄청난 일본 여행 붐이 있었다고 현지 친구들이 말해줬다. 그런데 요즘의 대세는 한국이라고, 점점 그 관심과 호기심이 커지고 있다고 했다.


현지에서 한식당도 최근 들어 점점 더 많아지고 있고, 인기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제는 일본이 걸어왔던 그 길에 한국 문화가 그 여정의 시작점에 있다고 느꼈다. 앞으로 한국으로 여행을 오는 유럽 관광객의 수도 점점 더 늘어나 서울이 본격적인 관광 도시로 더욱 커지게 될 것 같다. 아직까지는 우리 스스로 우리의 도시들을 떠올릴 때 국제적인 "관광도시"라는 확실한 느낌까지는 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해봐야 과거의 명동 정도.. 그런데 앞으로는 서울의 곳곳이,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이들을 유치하느냐에 따라 전국 곳곳의 도시들이 전에 없을 정도로 관광화 될 것 같다. 일본 문화가 스페인과 유럽에서 빠르게 성장하며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에는, 찾아보니 일본 정부가 유럽 현지에서 펼친 적극적이고 치밀한 문화정책도 한몫을 했다. 우리나라도 앞으로 들이닥칠 수많은 해외 관광객들을 잘 유치할 수 있도록 그에 대한 준비와 대비, 그리고 또 이 기회의 물결을 잘 키울 수 있도록 정부에서도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거란 생각을 했다. 더불어, 지나치게 관광화된 바르셀로나에서, 현지인들과 관광산업이 충돌하며 여러 가지 골머리를 썩고 있는 사례들을 참고하며 우리나라도 현명하게 관광으로 인한 젠트리피케이션과 같은 부분들을 섬세하게 대비할 필요가 있을 듯싶다.


바르셀로나에서 방문했던 서울 맛집을 방불케 하는 힙한 한식당


하하.. 개인적인 기회를 엿보며 나라 걱정까지 하는 정말 많은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 떠다녔다. 다만 무엇보다 뭔가 지금 이 흐름의 시작점에 있다는 것, 뚜렷한 선발주자가 안 보이는다는 점이 가장 맴돌았다. 20대를 거치며 어렴풋하게 내가 배운 것은, 결국 수요가 먼저 있는 것, 세상이 원하는 것, 그리고 그것과 나의 가치관과 포텐셜이 만나는 지점을 찾아내는 것이 나도 행복하고 사회적으로도 임팩트 있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껏 그것을 찾아 헤매왔다. 그런데 여기에 뭔가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어렴풋한 형상들이 계속 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그래, 더 생각 말고 움직여!
3주 만에 달성한 팔로워 8.7K, 누적 조회수 92만 회


침대에서 벗어난 날, 난 일단 스페인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원래 생각이라는 것이 깊어질수록 꼬리에 꼬리를 물며, '완벽한 타이밍'을 핑계로 안 되는 이유들, 어려운 이유들과 더 미루어야 할 이유들을 찾기 마련이다. 그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생각의 조건들을 만족시키면, 뒤돌아보지 않고 단호하게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스페인어를 재미있게 공부할 겸, 스페인 문화권을 타깃으로 한 작은 실험을 해볼 겸, 스페인어로 콘텐츠를 올리는 릴스 계정을 시작했다. 일단, 딱 일주일 동안만 더 깊게 생각하지 말고 매일 올리는 걸 목표로 정했다. 최대한 다양한 포맷을 자유롭고 즐겁게 올려보고자 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경과를 보고 그다음을 생각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첫 번째 릴스를 올리자마자 느낌이 왔다. 이거 뭔가 되겠다. 20대 동안 그냥 재밌다는 이유로 시간을 들였던 어쭙잖은 수많은 삽질들이 이 릴스를 만드는데 활용되었다. 많지는 않았지만 낯선 스페인 사람들이 찾아와 첫 번째 릴스부터 따뜻한 댓글들을 남겼다. 당신의 여정을 응원한다고, 이 계정은 금방 커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며. 나디아와 몇 안 되는 내 스페인 친구들의 초반 전폭적인 지지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나디아가 본인의 모든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내가 매번 새로운 릴스를 올릴 때마다 나를 팔로우하고 좋아요를 하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며 나를 열렬히 응원했다. 하하. 그리고 정확히 3일 만에 세 번째 콘텐츠에서 스페인 사람들의 감성을 건드리는 콘텐츠를 얼떨결에 만들어내, 18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이 릴스 하나로 2천 명 가까운 팔로워가 생겼다. 1분짜리 릴스로 총 시청시간이 단 며칠 만에 46일이라니. 이런 건 처음이었다. 댓글, 좋아요, 팔로우, DM 모두를 통해 내가 이들의 문화에 관심을 갖고 즐기는 모습을 즐거워하며 따뜻한 말들로 나를 응원했다. 그렇게 나는 멈추지 않고 7일간 매일 릴스를 만들어 올렸다. 그리고 다양한 시도와 실험을 해보면서, 콘텐츠와 계정의 방향성과 윤곽이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콘텐츠별 성과 분석을 병행하며, 똑같은 이야기를 담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것과 사람들이 원하는 것 사이의 균형을 찾으며 똑똑하게 접근하려고 노력했다. 시작한 지 3주가 된 이 시점, 연달아 콘텐츠들이 기본 5만에서 20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스페인, 라틴아메리카 문화권 사람들로 인스타그램 팔로워 7.5K를 달성하게 되었다. 나름 스페인의 준유명인사들과 인플루언서 몇몇도 나를 팔로우하는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다. 밀려드는 DM과 댓글들을 모두 번역기를 돌려가며 모두 차마 확인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엊그제는 라틴아메리카 출신의 가수(그렇게 유명하지는 않은 것 같다)가 콜라보 영상을 찍고 싶다는 DM 요청을 보내오기도 했다. 똑같은 콘텐츠를 틱톡에도 동일하게 올렸다. 틱톡은 안 써봐서 좀 익숙하지가 않은 탓에, 별다른 부가적인 액션을 하지 않고 똑같이 올리기만 했는데 1.2K의 팔로워를 얻었다. 콘텐츠를 올리고 반응들을 보면서 느낀 건, 내 본래의 감성과 정서, 유머가 여기 현지인들에게 통하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내가 굳이 쥐어짜듯 억지 부리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연결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여행을 하면서도 느꼈던 것 같다.


이걸 발판 삼아 향후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양한 고민들을 틈틈이 해보고 있다. 그런데, 사실 몇 가지 큰 가지들은 떠오르지만, 솔직히 또 잘 모르겠다. 근데 그게 맞는 방향인지 확신도 안 서고, 구체적인 방향과 방법에 대한 생각이 미궁으로 빠질 것 같으면 일단 생각을 멈추고 다음 콘텐츠를 고민하는 것으로 다시 돌아온다. 너무 많은 것들을 벌써 정하려고 한다면,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일단 7월 동안 30개의 콘텐츠를 즐겁게 최선을 다해 만들고, 내 릴스를 보아주는 감사한 이 모든 사람들과 어떻게 하면 더 잘 소통하고 연결될 수 있을지 그것에 집중해 보련다.


다만, 팔로워가 2천 명이 넘어갈 무렵 일찌감찌 정돈했던 명확한 기준점은 하나 있다. 나는 여행 유튜버나 인플루언서 활동으로 생업을 이어가는 콘텐츠 크리에이터가 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콘텐츠를 올리고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는 것 자체를 즐기고 싶은데,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니.. 나는 이게 생업이 되는 순간 나 스스로가 영원한 스트레스의 굴레에 빠져들 것만 같았다. (이게 나의 생업이 되는 순간,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조회수와 좋아요에 집착하는 집착광공이 될 것만 같다.) 또, 스타트업 백서 같은 것들에 따르면, 흔히 처음 1,000명의 지지자를 만들면 이들에게 도움을 주며 이들로부터 돈을 버는 길들로 가는 게 자연스러운 루트다. 근데 나는 지금 생긴 현지 팔로워들을 기반으로 보통 생각하는 '한국어 강좌' 같은 것으로 돈을 벌고 싶지도 않다. 혹은 릴스 계정을 잔뜩 키워서, 다른 신생 계정들을 대상으로 마케팅 컨설팅을 하는 방법도 있으나, 그것도 별로 하고 싶지 않다.(할 수 있냐 없냐를 떠나서 그냥 혼자 이렇게 상상회로를 돌려보는 거다..)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팔로워들을 내 고객이자 소비자라는 시선으로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케팅은 이 시대 속에서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와 관련된 일을 내가 나서서까지 몸 담고 싶은 분야는 아니다. 이들과의 이 판을 자본주의의 구조 속으로 밀어 넣는 순간, 나의 숙명은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들의 관심을 끌고 지갑을 열게 하는 장치들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길로 접어들게 될 거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니까 이런 구조 자체를 애초에 피하고 싶다.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다. 나는 그저 지금 생긴 팔로워들과 서로 지지하며, 좋은 영향을 주고받는 친구가 되고 싶다. 그리고 이걸 만들고 올리고 상호작용하는 이 여정 자체를 오래도록 즐겁게 즐기고 싶다.


그래서 지금 즐겁게 실험하고 만들어가는 이 릴스 계정을 발판 삼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을 찾고 싶다. 내 팔로워들로부터가 아니라, 더 큰 조직과 기관들과의 협업을 통해 돈을 벌고 싶다는 막연한 상상을 해본다. 아무 연고 없던 스페인 여행을 시작할 때, 내가 이곳과 연관된 뭔가를 해볼 거란 상상은 하지도 못했다. 이렇게 일단 그 길을 가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들이 있으니, 지금의 길 또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채 한 걸음씩 또 가보련다.


20만 조회수를 기록한 최근 릴스 콘텐츠




중요한 건, 여정 그 자체야


20대 때에는 그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 자체가 내게 중요했다면, 이제는 그것에 더해, 똑같은 노력을 들였을 때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도록 조금은 전략적으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의 가치와 효용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저 무소의 뿔처럼 무식하게 성실한 것만이 정직한 성취이며 최선인 줄로만 알았다. 그렇지 않은 것은 약삭빠르고 뭔가 꼼수를 부리는 것이라고, 그런 것은 제대로 된 게 아니라고 지레 생각했던 것 같다. 그것이 내게 부족했던 '현명함'이라는 걸 몰랐다. 이제는 그 현명함이 내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일을 지속가능하게 더 오래 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걸 이해하게 되었다. 이제는 좀 더 현명하게, 진정으로 내가 공감할 수 있는 가치를 둔 재미난 일들을 하며 살고 싶다.


여행하는 기간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멈춰 섰던 이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내가 가장 크게 배운 것은, 결국 삶은 '여정 그 자체'라는 사실이다. 나는 지금껏 어딘가를 향해 '도달하는 것'에 미쳐있었던 것 같다. 물론 그 과정에서 성장도 하고, 배움도 얻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과정 자체임을, '여정 그 자체'가 전부임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깨달았다. 그래서 지금 이 새로운 탐색의 여정에서 좋은 결실을 이루고자 나는 최선을 다하겠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길의 끝에 내가 어디에 도달하는지는 사실 그렇게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미리 정할 수도 없고, 정해진대로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과정의 이 순간순간들을 정말로 즐겼는지, 그 자체로 내게 의미가 있었는지, 이 과정 속에서 다른 누군가와 무엇을 나누었는지, 그런 것들이 그냥 사실은 본질이자 전부다. 그걸 잊는 순간 고통의 굴레에 빠져들게 되는 거다. 결승점에 나를 구원해 줄 빛나는 대단한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환상을 품고, 그것을 향해 미친 듯이 매달리는 것은 불꽃을 향해가는 불나방과 다름없는 것 같다. 그 끝만을 좇다 보면, 결국 그 길은 죽을 때까지 끝이 없는 마음의 지옥이 될 거다. 그러나 여정 자체가 전부라는 걸 이해한다면... 최선을 다하면서도 즐거움과 행복의 빛을 언제든 잃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어쩌면 소위 말하는 성공이라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아 졌다. 내가 과정에서 최선을 다하고 즐겼다면, 결과의 사회적인 승패는 내 손에 달린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이 시도가 소위 말하는 실패로 끝나도 정말로 상관없다는 생각을 한다. 뭐 나도 사람이니 아쉬울 수야 있겠지만, 또 다른 시도와 도전을 하면 되니까 괜찮다. 이미 그 일은 여정 그 자체로 그 역할을 다 한 것이다. 어찌 되든 또 길은 있기 마련이라는 천성적인 낙관주의를 가슴에 품고 간다. 내가 기억해야 할 게 한 가지 더 있다. 이 여정이라는 건, 작게는 내가 하고 있는 이 프로젝트, 나아가 이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 나의 일상, 가족과 친구들과의 관계, 이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하나에 빠지면 다른 건 잊어버리고 마는 이 불나방 같은 본성 때문에, 여전히 부족하지만... 이렇게 글을 쓰며 또 한 번 다짐해 본다. 말은 번듯하게 쓰고 있지만, 실은 어제 엄마 아빠 식탁에 두고, 쟁반에 혼자 밥상 들고 방에 들어와서 밥 먹으면서 내 할 일을 했던 내 모습을 자책하며 글을 남긴다. 그거 30분 뭐 그리 아깝다고 이 백수 녀석이... 아오... 뭔가 하고 있구나 하고 그저 묵묵히 지지해 주시는 부모님의 하염없는 믿음과 사랑을 왜 이리 쉬이 가볍게 여기는지... 또 한 번 반성하며...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와의 여정 또한 소중하게 다룰 것을... 가슴에 새겨본다. 언제 어디서 무얼 하고 있든, 언제 죽어도 후회 없는 그런 삶을 사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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