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 넓은관계
일하다, 고민하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오후 5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날씨 꾸물거리는데 만날 수 있겠어요?"
카톡을 하나 던졌다.
나는 이 말에 무엇을 담았을까?
"괜찮아요" 를 듣고 싶었을까, 아니면 "아 그럼 다음에 만날까요?" 였을까..
그런데 상대방의 대답은
"어려우시면 다음에 만나도 괜찮아요" 였다.
자신은 괜찮지만, 나를 배려해서 약속을 미룰 수 있다는 뜻이겠지, 원래부터 차분하고 배려심 많은 분이었으니... 그리고 그 답을 본 순간 '만날까 말까' 고민했던 게 꽤나 미안해졌다.
그냥 만나야겠구나...
내가 비때문에 나오기를 주저한다고 생각했겠다 싶어, 괜찮다는 답을 하고 서둘러 약속장소로 나갔다.
...
1년 반 만의 만남, 서로의 안부를 알았던 건 가끔 확인하는 인스타그램의 사진 정도-
미움이 참 가득했던 회사 앞 맛집에서 얼굴을 마주하니 반가움과 옛 기억이 함께 밀려왔다.
부서를 옮겼고 적응이 힘들었던 차라 누군가와 만나고 싶었다는 그 분.
'아... 그래서 나라도 만나고 싶었구나...' 서먹할지도 모를 둘의 만남을 성사시킨 이유를 드디어 알게되었다.
서로 배려에 배려를 거듭하면서 음식을 시키고, 맥주를 한잔씩 들이켰다.
나보다 5살은 족히 어린 친구이지만 내 아이보다 큰 두명의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
그래도 그동안 이것저것 회사에서 힘들었던 경험치는 내가 많은지라, 적응이 힘들어하는 그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조언을 건넸다. 아마도 내가 그 조직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것이 적지않게 도움이 되었으리라.
그리고 내쪽도 모든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올해 나를 괴롭혔던 일 들을 조금씩 꺼냈다.
정황을 잘 알고 있던 지인들과는 다른 반응에 사뭇 놀라기도 했지만, 차츰 차츰 더 설명해주면서 이해의 폭은 넓어졌다. 잠깐 밥이나 먹자고 생각했던 만남은 조금 더 길게 다양한 이야기를 머금고 있었다.
음식점의 오더시간이 끝났다는 이야기를 듣고나서도 우리의 대화는 끝나지 않았고
30여분이 더 지나서 왠지 "이제 좀 집에 가줄래?"라는 의미를 듬뿍 담은 음식점의 '신메뉴' 서비스를 받아들고서야 오늘의 모임은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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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가는 길,
마음은 한결 가벼웠고, 만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녀도 서로에 대해 100%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아마도 오늘 이야기 또한 모든 이야기를 다 꺼낸 것은 아니었을 거다. 그러나 두어가지 짐작갈 수 있는 부분은, 아마 서로를 오래 알아왔던 지인의 대답과는 다른 관점에서 내 이야기에 대한 답변을 들었을 것이고, 우리는 서로를 다 알지 못하고 많은 접점이 없지만 그래서 더욱 서로가 더 잘 살기를 마음으로 바랄 것이라는 점이다.
관계는 힘이든다.
가장 힘들게 하는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믿었던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그 관계에 힘을 좀 빼면 어떨까?
가끔은 느슨하고도 넒은, 서로에 대해 배려하면서도 기대하지 않는 그런 관계속에서
나는, 아니 우리는 또 다른 힘을 얻는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