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베어스(2022)
No Bears, 곰은 없다. 왜 이런 제목을 지었을까? 최근 재개봉한 영화인 <노 베어스 No Bears>(2022)는 2023년 내가 첫 번째로 극장에서 관람한 영화였다. 평소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보아서 제목만으로는 어떤 영화인지 유추하기 어려웠다. 영화를 보고 나서는 제목이 와닿았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노 베어스>는 영화에 대한 영화이자, 동시에 현실의 벽과 픽션/이상 사이를 오가는 창작자가 억압받는 시대에 대한 고뇌를 담고 있는 시네마이자 다큐 같은, 메타-시네마다.
<노 베어스>는 파나히 감독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이란-튀르키예 국경지대 마을에서 원격으로 영화를 연출하는 상황을 담고 있다. 실제로 파나히 감독은 이란 정부의 출국 금지 명령으로 국외로 넘어갈 수 없다. 영화 만드는 것 또한 2010년부터 20년 금지명령을 받은 상태이다. 그는 출국도 촬영도 할 수 없기에, 국경 근처 작은 마을에서 머물며 튀르키예에서 촬영 중인 자신의 영화를 노트북으로 전달받아 모니터링과 연출을 한다. 그가 만들고 있는 영화는 망명을 꿈꾸는 이란 연인들의 이야기로, 출연하는 배우들과 그의 열망, 현실의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을 담고 있다.
그런데 파나히 감독이 머물고 있는 국경 마을에서 예상치 못한 사건이 벌어진다. 아직 정혼제도가 남아있던 그 마을에서 정혼 관계가 아닌 남녀가 사귀고 있으며 그 증거자료를 감독이 촬영한 것인지로 인해 마을 사람들과의 갈등에 휘말린다. 그저 영화를 찍고 싶은 파나히는 영화에 몰두해보려 하지만, 영화에 출연하는 연인(극 중이 아닌 실제 연인관계로 나타난다)도 감독의 이상적 시나리오와 실제로는 망명할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하게 되며 파나히가 처한 상황이 더욱 복잡해진다.
21세기에 정혼과 사랑을 위한 망명이라니… 파나히 감독이 마주친 구세계적 가치관이 감독이 받고 있는 창작금지 제약처럼 다가왔다. 이런 현실적 제약이 <노 베어스>에서는 주요 모티프가 된다.
이란 정부의 억압과 파나히의 창작에 대한 열망, 마을 사람들 사이의 갈등, 정혼자와 아닌 자와의 대치, 영화에 출연 중인 연인들의 허구와 현실 사이의 괴리 등이 픽션과 논픽션 사이를 가로지르며 지나간다. 묘하게 촬영 중인 영화 속 연인들과 마을의 연인이 병치되는 점도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한다.
어떤 상황을 조망하고 담는 예술가, 그 예술가는 정말 보기만 하여 거기서 예술만 뽑는 사람인가 아니면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 입장인가, 노 베어스는 결말까지 이를 탐구한다. 이 질문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쭉 이어지고 있다. 아마도 미래까지 이어지지 않을까.
"No Bears"
영화에서 한 마을 주민이 자파르 파나히 감독과 어두운 골목길을 동행하며 그 지역에 곰이 있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그 주민은 나중에 길에서 헤어질 즈음 아무런 설명 없이 "그곳에는 곰이 없다"라고 말한다. 그저 사람들의 망상에서 비롯된 허구적인 이야기일 뿐이라고 언급하고는 떠나버린다.
영화의 제목이자 핵심 메타포인 "곰이 없다"는 말.
허상적 공포와 보이지 않는 억압에 대한 비유이지 않을까 싶다. 마을 사람들이 "그 길에 곰이 있다"며 두려워하지만 실제로는 곰이 존재하지 않듯, 현실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많은 제약들이 실체 없는 허상일 수 있다는 것.
이는 검열이 사회적으로 있으나 결국 창작자들이 스스로도 만들어낸 보이지 않는 경계선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지 묻는다. 곰은 정말로 존재하는가? 사회에 존재하는 곰은 과연 우리 안에도 곰이 존재하는가?
예술과 예술가의 정체성과 책임에 대해 생각하며 조용미 시인의 <내가 한 말들이>라는 시가 떠올랐다.
내가 한 말들이
-칼이 멜론을 찌르나 멜론이 칼을 찌르나 다치는 것은 멜론일 뿐이다
어제 내가 한 말들이
파편이 되어 나를 찌른다
아침부터 가슴에 무수한 난도질을 당한다
내가 차려놓은 말의 성찬에
초대된 한 사람, 그는
차나 한잔 생각하고 왔다가
과식을 하고 돌아갔다
며칠을 소화불량으로 고생할 것이고
내가 내어놓은 것은 부드럽고 편한 음식이
아니었다 그가 생전 처음 맛보는,
처음에는 그윽한 내음이며 모양새가
입맛을 돋우었는데
목을 타고 들어가면서부터 그것은
너무 쓰고 아렸다, 목이 탔다
그는 계속 물을 마셔 것이고 속이 더부룩할 것이고
어쩌면 탈이 날지도 모르겠다
혓바닥에 선인장을 심는다
어떤 사람들은 예술이 아름답기만 해야 하고 사회적 메시지와는 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노 베어스>의 메시지도 다른 많은 영화들도, 이 시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예술은 때로는(사실 자주) 고통스럽다. 창작자든 향유자든 고통을 주고받는다. 나는 그 점이 좋다. 어떠한 고통을 감수하고라도, 마냥 아름답지 않더라도, 사회에 메시지를 던지고 기꺼이 책임을 지고 가려는 운명을 지닌 작품들을 사랑한다.
<노 베어스>는 제79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 단순한 영화에 대한 영화를 넘어 현시대 검열과 표현의 자유라는 내용이 시사하는 바가 크기에 그런 듯하다.
예술가로서의 정체성과 창작의 본질에 대한 성찰. 현실과 영화 사이의 경계. 영화뿐 아니라 예술이 현실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 이는 다시금 파시즘이 세계 곳곳에서 고개를 들려고 하는 현시대에 창작자뿐 아니라 그것을 보는 관람객 모두가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