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더

by 김영근

“아이고…그래서요?....”, “전혀 기억이 안 나세요?...”, “찬찬히 다시 확인해 보셨어요?..”, “뭐,,, 어쩌겠어요? 열쇠를 다시 만들지… 아님 잠금장치 전체를 바꿀지… 내일 봐서 결정할게요. 뭔 큰 일 있겠어요?… 너무 걱정 마세요.”


며칠 전 저녁 일이었다. 목소리 톤을 높였다 낮추었다를 반복하던 아내가 전화를 끊고 전해주는 말이었다. “미시즈 K가 가게 문을 닫고 나갔는데… 가게 열쇠를 잃어버린 것 같다네. 일 끝내고 분명히 가게문을 잠그고 집에 갔는데…. 가게 열쇠가 없다는 거야. 다시 가게로 가서 확인해 봤는데 분명 문은 잠겨져 있고… 핸드백, 호주머니, 차 구석구석을 다 뒤져보았는데 없데요…..,.” 그리고 이어진 내 대답이었다 “어쩌겠남! 가게 문에 꽂혀 있지 않다면…. 뭐 별 일 있겠어.”


그닐 밤 걱정으로 잠을 제대로 못 이루었다는 미시즈 K는 이튿날 저녁 그녀의 옷주머니에서 가게 열쇠를 발견하였는데, 그 옷은 그 수선을 피우던 날 입지도 않았던 옷이었단다. 아마 이튿날 입으려고 미리 생각했던 옷에 넣어 놓은 것을 깜박했을 터.


뭐 그 정도쯤이야 우리 나이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아침에 일을 나가려고 열쇠뭉치를 찾았다 발견한 곳이 밤새 꽂아 두었던 현관문 바깥 잠금장치 열쇠꽂이였던 적이 있었거늘.


내 가게에서 함께 일하는 이들의 연령을 따져보니 옛날 같다면 가히 양로원급이다. 딱히 그렇게 계획한 일도 아니건만 지난 일 년 동안 변한 가게 모습이다. 70대 후반으로 접어든 베트남 할아버지 L과 라오스 할머니 L(이 L과는 함께 일한 지 30년이 넘었다.)을 시작으로 나와 한국인 미시즈 K가 그 뒤를 이어 70대 중반으로 달려가고, 이제 70을 바라보는 미시즈 L과 아내 그리고 이번 열쇠사건으로 맘 졸였던 미시즈 K는 모두 한국 할머니들이다. 그중 미시즈 K가 가장 어린 축이다.


그리고 가게의 활력이자 힘든 일들을 도맡아 하는 젊은 친구 둘이 있다. 모두 50대인데 대학 다니는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둔 멕시칸계 E와, 딸 쌍둥이를 대학에 보내고 있는 몽골계 M이 그들인데, 둘 다 늘 밝고 힘이 넘치는 아줌마들이다. 이 두 젊은 아낙들을 빼고는 나머지 노인네들은 모두 파트타임이거나 일거리를 집으로 가져가서 해오는 외주 인력들이다.


라오스 할머니 L과 멕시칸계 E 그리고 내 또래 미시즈 K를 빼고는 모두 올 한 해 인연을 맺은 이들이다. 아직 일을 놓을 때는 아닌 듯하지만 준비는 해야 할 듯해서 우리 내외 일 시간을 줄이다 보니 짜인 조합이다. 전혀 예상했던 일도 아니고 준비했던 일도 아니었다. 그냥 어찌어찌 맺어진 인연들이다.


오늘 아내 또래인 미시즈 L이 작은 연말 선물과 함께 남긴 쪽지 글이다. “인연이 되어서 심심하지 않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니 삼십 수년 전에 내 가게에는 20대 30대 젊고 어린 한국계, 멕시칸. 푸에르토리칸, 아프리칸들이 함께 했었다. 이젠 ‘심심치 않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6, 70대와 함께 한다. 오래전 그때엔 우리 내외도 30대였고, 이젠 6, 70대이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얼마나 될지 모를 일이다만, 바라기는 맞이하는 한 해만이라도 베트남 할아버지 L에서부터 열쇠덕에 하루 밤 잠 제대로 못 이룬 미시즈 L 까지에겐 내 가게가 ‘심심치 않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삶의 소중한 곳이 될 수 있기를… 아직 아이들 뒷바라지에 걱정 많은 멕시코와 몽골의 밝고 활기찬 두 아낙들에겐 작지만 마중물 그 이상이 되는 삶의 터전이 되기를…


하여 아직 우리 내외 은퇴는 이르다.

한 해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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