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도와 마음과 대화의 무게

1일 1커밋 #100

by 김디트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이면 왠지 마음이 착 가라앉는다. 비가 내리는 만큼 습기도 땅 근처를 배회한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면 물방울이 콧구멍을 채 통과하지 못하고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마스크를 끼고 있다는 걸 깜빡하고 콧잔등을 비벼댈 뻔했다. 아마 마음의 무게는 습기의 무게와 상당히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일을 하다가도 중간중간 창문 근처로 가서 어깨며 등을 스트레칭하며 코 속에 맺히는 마음의 무게를 확인했다. 그러고 나면 왠지 조금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또 한 번 안도의 마음을 품을 수 있었는데, 회사 동료분이 굉장히 눈 풀린 얼굴로 나에게 다가와서는 '오늘 비도 오는데..' 따위의 말로 운을 뗐기 때문이다. 뻔한 일이었다. 회사 밥 같은 걸로 끼니를 때울 마음을 접고 함께 맛있는 걸 먹으러 나가자는 것이겠지. 심지어 어제도 비슷한 동작과 첫마디로 나에게 접근해 왔었기 때문에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다만 어제는 이 상당히 힘 빠진 듯한 표정이 없었을 뿐이었다. 나는 욕구하는 그 시발점의 허들이 상당히 높은 편이었으므로, 그런 제안들에는 늘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어왔다. 이번에도 틱틱거리는 말투로 '어제도 나가서 먹었잖아요.' 같은 반응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분은 여전히 노곤한 건지 힘이 없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은 비가 오잖아."


순간 뭔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분을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비가 오는데 맛있는 걸 먹어야지. 이 말에 반박할 수 있는 어떤 대안도 나에겐 없었다.


비가 오는 날의 운전에 대한 두려움을 이야기했다. 그분은 숙련된 운전자였기 때문에 나의 두려움에 완전히 동조하지는 못하는 눈치였다. 아마도 내가 초등학생의 고민에 완벽히 동조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하지만 나에겐 어렵고 두려운 일이라는 건 사실이었다. 그분의 보조석에 앉아서 앞유리를 마구 강타하며 바스러지는 습기들을 관찰했다.


맛있는 건 역시 도움이 되었다. 손에 기름을 한껏 묻히며 타코를 입 안 가득 쑤셔 넣다 보니 습기나 두려움 같은 건 어찌 되어도 상관없겠다 싶었다. 그분도 안심했는지 그 젖어 있던 표정이 어느새 건조기로 바짝 말린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분이 자주 나를 불러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이유는 아마도 내가 잘 들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난 귀를 여는 것에, 그리고 필요할 때 상대방의 말을 동어반복적으로 되풀이하는 것에 꽤 자신이 있는 편이다. 그분은 평소처럼 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는데 사실 그 이야기 중 꽤 많은 것들은 이미 들어봤던 이야기들이었다. 난 그렇게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면서도 반복적이지 않은 형식으로, 마치 처음 듣는 사람에게 하듯 이야기할 수 있는 그분의 능력에 가끔 놀란다. 나는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하진 않을까 끊임없이 자신을 검열하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난 자주 '혹시 이 이야기했었나요?'라는 말을 이야기의 초입에 덧붙이곤 했다.


그 분과 헤어져서 돌아오는 길에도 여전히 비가 왔다. 경주도 비가 올까 싶을 때쯤 휴대폰이 울렸다. 누군가 해서 봤더니 엄마의 전화였다. 엄마도 그분처럼 이야기를 좋아하고 용기 있게 동어반복적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비에 쫄딱 젖어 나른해진 표정을 하고 있을 엄마를 상상하며 난 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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