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1커밋 #101
오늘은 집에서 회사 업무를 한 참이었다. 집과 회사는 각각 장단점이 있지만, 단연 집이 좋은 점은 회사 업무와 내 개인적 일정 사이의 로스 시간이 없다는 점이다. 회사 일이 끝나자마자 식사를 하고(식사 메뉴를 주체적으로 선정해야 한다는 점은 단점이다) 그대로 이어서 요가 매트를 바닥에 펼쳤다. 요가 매트가 부드럽게 바닥에 엉겨 붙었다. 아마 만화였다면 아기 말풍선과 함께 '퐁' 하는 효과음이 작게 적힐 것이다. 무척 하기 싫어서 오늘 아침 신나서 '운동하기' 하고 적었던 순간으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일정에 '운동하기'를 기입하는 그 순간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뭐든 할 수 있다면 그냥 운동을 하면 되는 것이었다. 결국 한숨을 쉬며 요가매트 위로 손을 쭉 뻗을 수밖에 없었다. 과연 귀찮은 것과 불안한 것 중 택해야 한다면 어떤 것을 택해야 할까. 손짓 몇 번으로 결정한 그 일정을 한 시간을 투자해서 해낼 생각을 하면 역시 귀찮은 건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다면 불안한 걸 택해야 할까? 하지만 나에게 깊고 큰 상처를 남기는 건 언제나 불안한 감정이었다는 사실을 난 잘 알고 있었다. 훕, 숨을 들이쉬고 다리를 들어 올렸다. 다리가 공중에서 파닥닥 했다.
옛날의 나는 꽤 자주 불안해했다. 그러면서도 늘 뭔가를 유예시켰다. 예컨대 시험 기간. 시험공부를 끝의 끝까지 유예시키는 데 전문가였다. 그러다 결국 '이 시험은 안 되겠다-' 하며 포기해버린 적도 있었다. 무언가를 반드시 해야 하는 압박감 속에서 벌이는 딴짓은 왜 그렇게나 꿀 같은지. 하찮은 청소마저 즐거워서 콧노래가 슬슬 나온다. 평상시에는 거들떠도 보지 않던 것들이 나의 시선을 잡아 끈다. 그러다 보면 나의 본문 같은 건 저 멀리 밀쳐져서 후순위의 후순위가 되곤 했다. 그렇게 밀쳐져 있는 본문은 다시 찾는 것도 일이었다. 그걸 다시 찾아서 다시 집중한다. 이 얼마나 지난한 과정일지. 상상만으로도 몸서리쳐졌다. 그래서 난 시험기간 일주일 전, 밤새 공부한다는 핑계를 대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라이온 킹을 1, 2, 3편 내리 달리고 말았던 것이다.
꽤 오랫동안 그 불안감의 원인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느낌적으로는 분명히 '할 일을 유예하는' 것 때문이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유예하지 않으면 되는 일 아닐까? 그래서 이렇게 생각했다. '다음번엔 더 집중해서, 절대 미루지 말아야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늘 하던 대로 했다. 늘 하던 대로 하는데 어떻게 개선될까. 나는 늘 불안해했고, 늘 실패했다. 어김없이 하던 대로 실패했다. 결국 '유예하지 않는 것' 그 너머의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 와서 조금 윤곽이 잡힌 그 불안감의 원인은 바로 '명확성'에 있었다. '목표'라고 말할 수도 있고. 좀 더 자세히 말해보자면, 시작점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던 점이 불안함의 원인이었다. 이를테면 시험공부를 시작할 때. 난 대체 어떤 지점을 시작점으로 잡아야 할지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사실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그냥 눈 딱 감고 시험 범위의 첫 번째부터 마지막까지를 무식하게 읽고 옮겨 쓰고 외우는 식으로 접근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방법이고, 누구나 실패했을 방법이었다. 이 방법에 성공한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 방식이 너무 재밌어서 참을 수 없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재미가 없었고, 그래서 늘 포기했다. 그리고 불안해했다. 그 무한한 불안의 굴레에 빠져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그 굴레에서 벗어날 방법은 단 한 가지였다. '할 수 있는', 될 수 있으면 '재미있는' 목표로 잘게 쪼개어 조금씩 해나갈 것. 근데 그 방법을 체득하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말과 글로는 도저히 이 뉘앙스를 전달할 수가 없다. 해나가던 방식을 바꿀 만큼 달콤하게 들리지가 않는다. 나는 수없이 많은, 이를 변주한 말과 글들을 마주했었으나, 모조리 무시했다.
게다가 막상 그렇게 해도 별 재미가 없다. 오늘만 해도 귀찮음과 불안함을 저울질하면서 요가 매트를 깔았던 참이다. 하지만 그것도 하기 직전까지의 일이다. 해내고 나면 완전히 생각이 달라진다. 슬픈 점은 이런 감정의 변곡점이 매일매일, 하기 직전에는 늘 존재한다는 점. 그래도 불안함의 보상보단 귀찮음의 보상이 훨씬 좋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나도 결국 언젠가는 물구나무서기를 할 수 있게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오늘도 운동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