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 대한 로망

1일 1커밋 #102

by 김디트

이따금 애인은 나에게 '잠의 질이 좋지 않은 것 같다'며 타박을 줬다. 또한 나부터도 빈번히 내 삶의 모든 피로의 원인으로 잠을 꼽았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판독할 수 있는 자료가 전혀 쌓여있지 않기 때문에 확실하진 않았다. 사실 무슨 결과든 단 하나의 원인으로 인해 발생할 순 없는 노릇이다. 심지어 오늘 먹은 저녁밥만 하더라도 그 결정에 미친 원인은 수도 없이 많다. 딱히 다른 식사가 먹고 싶지 않았고, 마침 사원 카드를 가지고 왔는 데다가, 회사에 나오면 언제나 사내 식당에서 식사를 하곤 했으니, 게다가 사내 식당의 메뉴는 코로나로 인해 한 가지만 나오고 있었으니 결과적으로 난 제육 정식을 먹게 되었다. 그러니 내 삶의 피로에 대한 원인으로 집요하게 잠을 꼽는 건 조금 공평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아마 날이 갈수록 이 바래만 가는 이 신체의 노쇄함 같은 게 더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고, 좋은 수면 같은 건 마치 꼬박꼬박 비타민을 챙겨 먹는 정도의 효능밖에 발휘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옛날부터 난 잠에 잘 드는 체질이었다. 얼마나 잘 들 수 있었냐면 오전은 내내 잠만 자면서 보낼 수도 있을 정도였다. 잠이라면 정통했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엄마가 챙겨주는 아침밥을 후루룩 마시듯 뱃속에 넣은 채로 등교 봉고차에 몸을 싣고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조는 그 잠결을 그대로 학교까지 가지고 가서는, 내 자리에 도착하자마자 절 하듯 책상 위로 엎어져서 쿨쿨 잠들곤 했다. OTP라는, 투명 필름을 벽으로 영사시켜주는 장비가 내 옆자리에 자리할 때도 있었는데 나는 옳다구나 기계에 기대어 좀 더 편안한 자세를 만들고 잠들곤 했다. 0교시라는,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자습시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그 시간을 온전히 침대에서 보낼 수 있었다면 내 잠의 질은 지금보단 조금 더 좋아지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하지만 아마 그렇게 조금 더 개선된 잠을 잘 수 있었어도 지금 나잇대가 된 난 여전히 수면의 질 운운하고 있겠지.


그렇게 잠이 잘 드는 체질이었음에도 그 잠깐의 자기 전 시간이면 뭔가가 아쉬워지곤 했다. 그게 뭐냐면, 콘텐츠. 눈요깃거리. 지금이야 스마트폰 전원을 넣는 것으로 모두 해결할 수 있는 것이 그 시절에는 모두 커다란 덩어리로 나뉘어 쪼개져 있었다. 뉴스나 예능 같은 영상물은 TV로, 인터넷이나 게임은 컴퓨터로. 컴퓨터도 TV도 거실에 있었기 때문에 정말 가끔, 정말 정말 잠이 오지 않을 때면 거실로 살금살금 기어나가서 컴퓨터 전원을 살며시, 전원 딸깍이는 소리조차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눌렀었다. 위이이잉- 하고 팬 돌아가는 소리가 냉장고가 웅웅 하는 소리를 덮으며 집 안을 가득 메울 때면 안방을 초조하게 바라봤다. 혹시 몰라 조금 열려 있는 안방 문을 살며시 닫기도 했다. 그렇게 하는 인터넷이나 게임은 마치 어른의 세계를 잠깐 엿보는 것처럼 다가왔다. 내 방과는 다르게 안방은 밤새 TV가 켜진 채로 잠든 엄마 아빠의 얼굴을 하얗게 비추고 있곤 했었다. 언제든, 심지어 늦은 밤 잠들기 전까지 그런 콘텐츠들에 접근할 수 있다는 건 그야말로 어른의 특권이었다. 늦은 밤, 콘텐츠들이 가지는 권력. 이따금 토요명화 같은 걸 보면서 부모님과 밤늦게까지 영화를 볼 때 짜릿했던 이유도 아마 그 권력에 기대어 밤을 조금이나마 더 누릴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꽤 오랫동안 자기 전에 영상을 보는 것이 로망이었다. 얼마 전엔 오래된 영화를 켜 둔 채 잠을 청해 보았다. 영화 소리가 어둠과 어둠 사이로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깊고 즐거운 수면을 취했다.


라면 좋았겠지만 실은 그렇진 않았고. 오래되었지만 내가 너무 좋아하는 영화였기 때문에 결국 영화를 끝까지 다 보고 나서, 모니터를 끄고 완전한 어둠이 찾아들고 나서야 잠들 수 있었다. 결국 늦게 잠들었으니 수면의 질이 좋았을 리 만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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