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1커밋 #117
장장 저번 주 수요일 밤부터 시작된 길고 긴 노동의 시간이 지나갔다. 옛날부터 화이트 칼라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암시 같은 걸 꾸준히 지속적으로 받아왔고, 그런 이유일까 결국 그런 직업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몸을 움직이는 노동을 체감할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일 년에 두 번 정도 있는데, 그건 설과 추석, 고향으로 내려갔을 때 부모님의 가게를 도와야 할 때뿐이었다.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손가락만 다각 다각 움직이는 것을 일생을 걸쳐 노동으로 체화된 사람에게 몸을 움직이며 하는 노동은 정말 낯설기 그지없다. 안 쓰던 근육을 사용해서 몸이 쑤시는 건 둘째 치고, 우선적으로 정신적 고갈이 심각하다. 몸을 움직이면 머리를 사용하지 않을 것 같다는 그런 막연하고 잘못된 고정관념이 있는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어떤 동선으로 어떤 자세로 무엇을 먼저 어떻게 할 것인지 끊임없이 머리를 굴려야 하는 것이다. 엄마의 언어를 빌리자면 일명 '일머리'라는 것이다. 낯선 현장에서 평소에 쓰지 않던 근육(뇌근육을 포함해서)을 써야 하는 그 행동은 정말 노동이라는 단어에 걸맞은 것이었고, 그래서 나와 동생은 고작 일 년에 두 번 귀향하는 것에도 큰 피로를 느껴야 했다. 동생은 그 노동을 곧잘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가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번의 노동은 그런 연례행사 노동과는 다르게 갑작스럽고 다급하게 결정되었다. 발단은 동거인 중 하나가 독립을 하겠다고 선언한 것. 두 명의 동거인 중 하나인 이 사람은 나의 대학교 시절 선배로, 나를 커피 중독자로 만든 가장 큰 원인으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내가 서울에 상경한 후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동거해온 사람이기도 하다. 동거인 중 나머지 하나는 능구렁이 같은 동생이고. 아무튼 선배와는 함께 살아온 기간이 장장 6년이었다. 선배가 이 집을 나가는 것이 '각자 살기'가 아니라 '선배의 독립'처럼 다가오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다.
선배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충동적인 사람이었다. 어떤 일을 해야겠다, 하면 했고 어떤 것을 가지고 싶다, 하면 가졌다. 수중의 돈으로 얼추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모두 즉흥적으로 해내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웬만한 없어서 아쉬운 물건들은 십중팔구 선배의 방에서 찾아낼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설마 집까지 그런 식으로 옮길 줄이야. 나는 선배의 충동적 기질에 경외감마저 들었다.
"나 집 계약했어."
대략 한 달 전 쯤, 선배는 무심하게 툭 내뱉었다. 사실 이따금 '이제는 혼자 살아야지.' 하고 말하곤 했었기 때문에 당장 큰 충격을 받진 않았다. 나는 내심 '아마 나에게 딱히 말하진 않았지만 가끔 휴일에 짬을 내어 부동산 곳곳에 발품을 팔았던 모양이지' 같은 생각을 했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인이 추천한 부동산의 매물을 보고 그 날 단박에 계약이 성사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난 그런 방식으로 집을 구할 수 있었을까. 아마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매사에 겁이 많았다. 가봤던 안전한 길과 가보지 않은 불안한 길이 있으면 늘 안전한 길을 택하곤 했다.
아무튼 6년의 기간을 함께 한 사람이 이사를 한다는데 그냥 '잘 가라'라고 하고 끝낼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삿날이 다가오자 나는 물었다.
"이번 주 목요일에 나가요?"
"그날 나가도록 해야지.."
왠지 습관적으로 다그치는 말투였던가. 이 집에서 잔소리를 맡고 있는 나는 자기반성을 하며 다시 물었다.
"아니, 나가면 휴가 써서 이사 좀 도와주려고."
그제야 선배의 얼굴이 밝아졌다. 목요일 날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잘 모르겠다며, 그 전날 다시 한번 보고 결정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선배의 이사 전날이 되었다. 비가 온다는 소식은 여전했다. 하지만 선배는 이사를 강행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다음날 연차를 사용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 밤. 회사를 마치고 밤 10시 경이되어서 집에 도착한 나를 맞이한 것은 소파에 누워서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는 선배였다. 이삿짐을 꾸리기는 커녕 이사할 마음조차 없어 보였다. 나는 어이가 통째로 뽑혀 올라오는 기분을 맛보며 버럭 소리쳤다.
"얼른 일어나서 거실에 책부터 정리해요!"
나의 노동의 발단은 바로 그렇게 시작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