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1커밋 #118
집에서 사람이 빠져나간다는 건 다르게 표현하면 물건이 빠져나간다는 말과 같다. 20평 남짓의 비좁은 공간에서 3명이 몸을 맞대며 살아온지 벌써 2년 9개월. 비록 각자의 방을 가지고 있었지만, 각자의 물건은 그 방에 완전히 다 담기지 않고 스멀스멀 거실로 새어 나왔다. 고백하자면 가장 많이 새어나와 있는 사람은 나였다. 레미콘이 꾸덕한 아스팔트를 쏟아내듯 내 방은 와르르 책을 쏟아냈다. 그 덕에 거실은 서재인지 거실인지 부엌인지 그 용도가 매우 불분명해진 채였다. 하지만 그런 면에서는 선배도 만만치 않아서, 내 책을 제외하고도 꽤 많은 분량이 이제 곧 이사를 갈 선배의 것이었다. 선배의 컬랙터 기질은 읽지도 않을 책들을 집 구석 구석 꼼꼼히도 쌓아올렸다. 결국 그래서 공용 공간인 거실에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짐은 책이 되고 말았다. 선배에게 가장 먼저 '책'을 정리하라고 다그쳤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다.
선배는 우리에게 이별 선물로 원목 거실 테이블을 선물해 주었다. 사실 이사를 가면 이래저래 많은 돈을 써야 할 것이 불보듯 뻔했기 때문에 나는 별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동생은 '이사 가면 또 신나서 이거 저거 살려고 하나보네.'하고 선배의 심정을 일축했고, 나는 정말인가 같은 심정이었다. 동생의 추측이 완전히 틀렸다고 부정하긴 힘들었던 것이, 선배는 기꺼운 마음으로 꽤 많은 살림살이를 우리들에게 이양했다. 이를테면 침대, 커피 그라인더, 전신 거울, 체중계 같은 것들. 선배가 남기고 간 것들은 매우 사소한 것부터 꽤 값나가는 것까지 다양했다. 그것들에 더해 원목 거실 테이블까지. 원래 있던 거실 테이블은 동생이 서울에 상경해서 오랜 기간 사용하던 것으로, 정말 이제는 떠나보낼 때가 된 물건이긴 했다. 선배는 그것이 마음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선배의 선택에서는 신중함과 아쉬움이 함께 묻어났고, 나는 조금 감동했다.
더욱 감동적인 것은 원목 거실 테이블의 질감이었다. 테이블은 투박하게 생겼음에도 질감만으로 나무를 대충 흉내낸 시트지를 바른 MDF 가구와는 차원이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그 질감의 차이는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이었다. 그 대비를 며칠간 참아내던 난 김하나 작가님의 '하지만 사실 삶의 진짜 궤도 같은 것은 없다'라는 말을 상기하며 이 참에 집에 가구혁명을 일으키리라 다짐하고 말았다. 그것이 끊없는 노동의 시작이 될줄은 꿈에도 모르고...
우선 이 좁은 집에 세 개나 되는 책상이 들어선 것부터 개선해야 했다. 실제로 책상을 사용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동생과 선배의 책상은 각기 물건을 쌓아두는 용도 같은 것으로만 활용되고 있었고, 그건 집의 분위기를 전체적으로 완전히 망쳐놓고 있었다. 책상을 모두 버리고 커다란 원목 책상을 사기로 했다. 원목! 원목이어야 했다. 나는 원목 거실 테이블에 완전히 꽂혀버린 것이다. 거실도, 테이블도 아닌 원목에 그대로 확실히 명확하고도 정확하게 꽂히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원목 책상을 구매했다. 분명히 사람이, 물건이 빠져나가는 일로 시작된 것이 새로운 물건을 사는 것으로 끝맺음 되는 것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이물감은 책상이 도착하자 씻은 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채 박스에서 뜯어내기도 전이었건만, 그 책상은 굉장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나는 선배와 함께 원래의 흠결 가득한 시트지 바른 MDF 책상들과 그에 맞춰 산 의자들을 밖으로 덜어냈다. 책상의 무게감은 사용한 3년의 기간을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고, 나와 선배는 순식간에 녹초가 되고 말았다.
내가 결정한 일이었지만, 거실을 정리하는 것과 이삿짐을 싸는 것을 함께 하는 건 역시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둘 다 아무런 제반 작업이 되어있지 않은 상황. 나는 막막했다. 하지만 나는 제법 많은 막막함을 뛰어넘어 왔다. 어떻게 하면 막막함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 그 스타트 라인 정도는 가늠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혼자의 힘으로 구직을 하고 집을 구하고 가구를 사고, 이른바 어른의 일들을 수차례 해왔던 터였다. 막막함을 뛰어넘는 방법은 간단했다. 일단 작고 간단하고 쉬운 일부터 차근차근 해결해 나가는 것.
그래서 이사의 결론은 어떻게 났느냐면, 결국 또 다른 원목 가구를 주문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고 말았다. 그 날 밤, 그리고 다음날을 꼬박 사용해서 선배의 이사를 도와주었다. 사람이, 물건이 빠져나갔고, 집에는 딱 선배가 빠져나간 만큼의 공간과 함께 정리되지 않은 수많은 나의, 동생의 짐이 남았다. 선배가 나가고도 며칠이나 지났건만, 그 원목 가구들은 아직까지 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는 하루종일 초조하게 그 가구들의 행방을 쫓으며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아직 채 정리되지 않은 거실의 한 구석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