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미래의 반지와 룩을 상상했다
1일 1커밋 #116
하루 일정을 짜는 데도 여러 타입이 있다. 계획적으로 딱딱 맞아 들어가야 마음에 평안을 얻는 타입,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타입, 흥미가 동하는 것은 반드시 얼씬거려봐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 이렇게 세 종류의 점을 딱 딱 딱 찍어놓고 선을 죽 긋는다. 중간 점과 마지막 점 사이, 하지만 중간 점에 한없이 가까운 점이 나라고 할 수 있다. 대략적인 목적지만 정하고 흘러가듯 걸으면서 눈에 띄는 것들마다 발걸음을 멈추는 스타일. 하지만 목적지에 가는 것이 목적이라는 걸 몇 번이고 상기하면서 엇나간 발걸음을 조금씩 수정해 나가는 스타일이다. 반면 애인은 마지막 점, 흥미가 동하는 쪽의 점에 상당히 많이 치우친 곳에 점을 찍어야 할 것이다. 애인과 함께 걷고 있으면 난 이 거리에 이렇게나 볼게 많았나 새삼스럽곤 했다. 애인은 내가 차마 생각하지 못했던 흥밋거리들을 찾아내는 재주에 능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능히 찾아낼 수 있는 건 소품점, 플리마켓 류였다. 애인은 다양한 색깔, 에스닉 풍, 심플한 듯하면서 은근한 디테일을 가진 물건들에 남다른 애착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목적지와 멀어지는 걸 알면서도 애인의 손에 이끌려 크고 작은 소품들 앞에 끌려가곤 했다.
아마 애정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대상과 닮아지는 일일 것이다. 나는 프로그래밍을, 글을, 성실함을, 그리고 애인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들과 몹시 닮아가는 중이었다. 애인의 취향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애인이 좋아할 만한 물건들을 꽤 높은 확률로 알아맞힐 수 있게 되었는데, 맞추는 방법은 간단했다. 내 마음에 드는 걸 선택하면 되는 일이었다. 애인은 그 점이 꽤 재미났던 모양인지 이따금 몇 가지 물건들이 모인 가판을 가리키며 이 중에서 뭐가 제일 이쁘냐고 질문을 던지곤 했다.
취향이 생긴다는 건 그 세계에 진입할 출발선에 섰다는 뜻이었다. 나에게도 하나 둘 소품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기준들이 생겨났다. 비록 시작은 애인의 취향의 복사본이었지만 점차 차이점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렇다곤 해도 결국 근본은 애인의 취향이었기에, 내가 선택하는 물건들은 근본적으로 색이 다양하고 에스닉 풍이고 심플한 듯 디테일한 것들이었다. 그건 반지일 때도 있었고 피어싱일 때도 있었다. 애인과 함께일 때는 주로 반지였다. 정말 오래전에 구매한 토끼 모양의 반지는 오랫동안 내 새끼손가락을 감싸고 있었고, 결국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한쪽 눈의 큐빅이 사라지고 말았다. 토끼 반지 이후로 애인은 빈번히 나에게 새로운 반지를 권했다. 이 반지는 어때, 저 반지는 어때 하면서. 하지만 당연한 일이지만, 가격이 저렴하면 퀄리티가 낮았고 퀄리티가 높으면 가격이 비쌌다. 그 중간을 만족하는 완벽한 반지는 자주 발견할 수 없었다. 난 자주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고, 애인은 이번에도 완벽하게 마음에 들지 않나 보군! 고개를 끄덕이며 미련 없이 다른 가판을 향하곤 했다. 그래서 근 7년 동안 나의 까다로운 기준을 통과한 반지는 이제 세 개를 겨우 채우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사실 나보단 되려 세상의 기준이 까다로운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 나의 취향은 근본적으로 애인의 취향이었다. 그런데 그런 취향을 가진 이는 무릇 여성일 거라고 쉽게 판단하고 재단한 세상은 그런 형태와 뉘앙스의 반지는 모조리 자그맣게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내 취향의 반지들은 모조리 내 새끼손가락에만 들어가는 사이즈였다.
나는 남성이 치마를 입는 패션이 '남친룩'이라는 지극히 프레임 지향적인 이름이 아닌 지극히 젠더 리스한 이름으로 매우 보편적인 패션상으로 유행하는 세상과 함께 내 네 번째 반지는 어떤 모양일까 상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