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유독 밤은 감성적일까. 밖으로 나왔다. 아마도 밤이라서, 밖으로 나왔다. 비가 와서 촉촉하게 젖은 땅을 잘못 발로 차서 슬리퍼 일부분이 젖어 들어 울상을 지었다. 그런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역시 밤이 되면 왠지 모르게 나가고 싶었다. 사실 시간적으로 밤 밖에 여유가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구체적으로 따지자면 감성적인 이유가 좀 더 컸다. 오늘 밤은 구름이 잔뜩 끼여서 하늘이 젖소 무늬처럼 보였다.
밤을 걷다 보면 어김없이 내가 좋아하는 영화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전혀 닮은 구석이라곤 없는 서울의 팍팍한 도시 풍경 속에서 왠지 모르게 비포 선라이즈. 밤거리를 걷는 제시와 셀린의 모습을 찾아내고야 마는 것이다. 마음을 잔잔하게 만드는 공기와 바람, 그리고 새벽을 통과하다 보면 의례히 겪는 몽롱함. 그런 것들과 함께 영화의 장면들이 편린처럼 여기저기서 불쑥 등장한다. 오늘 밤이 지나가면 영영 보지 못하리라는 걸 아는 둘 사이의 쓸쓸함과 다정함 같은 걸 떠올리다 보면 왜 유독 밤거리에서 영화의 그 장면들이 떠오르는지 납득이 되곤 했다.
오래된 기억과 얼마 되지 않은 기억들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교차되었다. 오래된 기억은 그 오래됨 때문에, 얼마 되지 않은 기억들은 먼 미래에 이미 약속된 오래됨 때문에 쓸쓸하다. 문득 옛 직장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새벽까지 업무를 하고 동료들과 함께 찜질방으로 가던 기억. 조용한 새벽, 씻고 나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눈다고 나눴지만, 조금 들어간 맥주 때문에 이내 목소리가 조금 높아져서 관리하시는 분이 주의를 줬던 기억. 취기 때문인지 새벽 공기 때문인지 잘 모를 그런 나른하고 쓸쓸한 감성들. 아마도 사람들은 그 쓸쓸함을 임의적으로 실컷 맛보기 위해서 술을 마시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과 반년 전의 일도 떠올랐다. 친구가 서울로 올라왔었다. 하룻밤 묵고 갔을 뿐인데, 왜 문득 그 순간이 떠오른 건지. 친구는 늦은 시간 우리 집에 잠깐 잠만 자러 들른 것이었다. 배가 고프다고 칭얼거림 아닌 칭얼거림을 부렸고 나는 살짝 귀찮은 티를 내며 옷을 걸쳤다. 늦은 시간, 더군다나 코로나 때문에 밤 시간에 열린 가게는 많지 않았다. 한국인은 밥을 먹어야 한다며 반드시 밥집을 고수하던 친구 덕에 꽤 많은 거리를 걸어갔다. 그러다 겨우 열린 김밥천국 하나를 발견하고 들어갔었다. 그런 사소한 기억일 뿐인데. 오래된 기억도 아닌데. 왜 이런 기억조차 중요하고 소중하게 느껴지는지. 언젠가는 이 기억도 수십 년 전의 기억이 될 거라 생각하니 왠지 맥주라도 한 모금 마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왜 밤은 이렇게나 감성적인 걸까. 왜 그래서 이런 글을 이런 방식으로 끈적하게 적어 내려 가도록 만드는 걸까. 겨우 태양빛이 조금 닿지 않고, 조금 졸릴 뿐인 것, 조금 나른할 뿐인 것이 왜 이렇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만약 글도 밤 같은 글이 있다면, 가끔 그런 글을 소비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근데, 이런 니즈가 있다면 나도 하나쯤 써도 되지 않을까, 연이어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