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의 기록

1일 1커밋 #28

by 김디트

난 애인과 안고 침대 위를 뒹굴거리는 걸 좋아한다. 애인은 좋아할 때도 싫어할 때도 있다. 이따금 좋아하고 빈번히 무뚝뚝하고 꽤 자주 싫어한다. 이따금 좋아할 때는 거기에 대해 아무런 변명을 달지 않아도 되어서 편하지만 편한 만큼 뭔가, 마치 요리 중에 조미료 하나를 빠뜨린 것 같은 기분이다. 무뚝뚝하거나 싫어하는 경우에는 늘 언젠가 봤던 건강 뉴스의 한 토막, '사랑하는 사람과 안고 있으면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말을 운운하며 더욱 엉겨 붙고, 애인은 유달리 표정을 찡그리곤 는데 그제야 아귀가 들어맞는 퍼즐 조각을 찾낸 것 같은 기분이 되는 것이다.


오늘도 꽤 오랫동안 뒹굴 뒹굴, 서로의 체온 때문인지 보일러를 과하게 틀어서인지 모를 후끈거림 속에서 서로를 안고 있었다. 그러고 있으면 스르르 잠드는 게 다반사다. 그 이유 때문에 애인은 우리 집에 오면 늘 늘어지고 오래 잠자게 된다며 투덜거리곤 했는데, 요새는 그 과정에 대해 모종의 감내가 있었던 모양인지 별로 내색을 하지 않게 되었다.


애인은 어제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나는 애인과 함께 있고 싶어서일지, 휴가를 쓰기 위한 핑계가 생긴 게 기뻐서일지, 두 가지 모두의 이유에서일지, 아무튼 재빨리 휴가를 쓰고 애인을 마중 나갔다. 오늘 애인이 우리 집 후끈한 방 모서리에서 노곤 노곤 익어가면서 모바일 게임을 하고 있는 이유다.


애인은 이따금 우리의 순간순간을 글로 남기곤 한다. 그 순간의 미묘한 감정과 유머를 어찌나 손쉽게 옮겨 담는지, 내가 매일같이 다이어리에 무미건조하게 옮겨 적는 상황 설명글과는 결이 너무나 다르다. 하지만 애인은 그 재미에 반비례하게도 와의 포옹을 반기는 빈도로 글을 적는다. 6년간의 글들을 아무리 끌어모아도 책 분량에 닿기에는 요원해 보인다. 어쩌면 조금씩 감질나게만 쓰는 것이 맛있는 글을 쓰는 비결인지도 모르겠다. 이 글들의 독자 풀이 매우 좁아 나의 이런 가설에 대한 토론을 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작년 중순쯤, 애인은 나의 다음 다이어리, 그때로 치면 내년 다이어리를 종용한 적이 있다. 중순이라면 아직 작년 다이어리를 반절밖에 쓰지 않은 시점이다. 애인은 유달리 작년의 다이어리를 싫어했기 때문에 간혹 새 다이어리가 보이면 '이건 어때' 자주 질문을 던지곤 했는데 그 날은 유달리 강경한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집 근처 편집샵에 전시되어 있는 2공 다이어리였다. 여러 가지 속지들을 함께 팔고 있었는데 그런 자유자재의 커스터마이징이 애인의 마음을 끌었던 모양이다. 애인은 나의 다음 다이어리에 꽂을 거라고 선언하면서 간간히 그 감질나게 맛있는 글을 쓸 요량으로 속지 하나를 따로 샀다. 나는 애인에게 이 참에 그냥 커버도 살까 했지만 애인은 고개를 설레 설레 저었다. 아마 그때 샀더라면 나는 미도리 트래블러스를 사지 않았을지도, 그리고 애인의 그 반절도 적지 못한 속지를 올해 다이어리에 곱게 끼우고 다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 애인은 내 침대 머리맡의 벽걸이 선반에 배경처럼 놓여있던 그 속지를 발견했다. 늘 그 자리에 있었는데도 애인은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집어 펼치고는 자기 옆자리를 팡팡 두드렸다. 그 하이텐션은 애인의 장점 중 하나이다. 난 못 이기는 척 애인 옆에 앉았다. 속지 안에는 작년 중순부터 몇 달간의 기록이 겨울잠이라도 자는 듯 가만히 웅크리고 있었다. 글은 꿈틀거렸고 그림은 펄떡거렸다. 애인과 나는 글과 그림을 한눈에 훑으면서 작년의 크고 작은 일상의 파편을 해변 조개껍질 모으듯 주섬 주섬 모았다.


끝의 끝까지 빈 접시 핥아먹듯 읽은 애인은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재밌다!"


나는 애인이 그렸던 4컷 만화에 시선을 꽂은 채 너털웃음 지었. 만화에 묘사된 당시의 상황은 애인의 시각으로 9할 이상 필터링되어 있었다. 만화 뿐 아니라 글들도 모두 지극히 애인 중심적인 것들 투성이였다. 그저 나와의 관계에서 생성된 부산물만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상황과 생각, 그 날의 기분과 자신의 신념 등, 다방면의 것들로 속지를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감정 과잉이 언제나 나쁜 건 아니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글에서는 그 지극한 부분이 여과 없이 과잉적이라 되려 사랑스러워 지곤 하는 것이다.


속지 내용을 훑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애인은 뒷부분의 공백을 아쉬운 듯 쓰다듬었다. 작년에 그 2공 다이어리 커버를 사라고 했어야 했는데 하는 속 쓰린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속지는 아마도 이렇게 작년 애인의 글과 그림을 품은 채, 그것으로 용도를 다한 채 내 다이어리를 모아둔 박스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속지의 남겨진 뒷 공백을 생각하며, 애인이 내 올해 다이어리에 억지로 그 지나간 속지를 구겨 넣어보려 하는 걸 바라보았다. 애인의 낑낑거리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속지가 다이어리에 들어갈 방법은 묘연해 보였다.


21. 0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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