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아직까지 쓰고는 있는데
1일 1커밋 #34
지금은 이렇게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글을 쓰고 있지만 누구나 그랬듯이 나도 '쓰기'와 처음으로 마주했을 때가 있었다. 나의 경우 중학교 1학년이었다. 지금에 와선 나조차 상상하기 힘들지만 놀랍게도 그 이전까지의 나는 '읽기'만의 세계에 속한 채 살고 있었다. 당연히 학교에서 소소하게 교과과정에 따른 글쓰기를 하지 않았을 리는 없으니까, 즉 처음으로 목적의식 없이 순수히 자진해서 글을 쓴 시점을 말하는 것이다.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걸 갈망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말인즉슨, 이 '쓰기'의 영역에 혼자 도달할 수는 없었다는 말이다. 나의 손을 잡아끌고 '쓰기'의 경계선을 얼핏 보여주고 담을 뛰어넘는 용기를 북돋게 해 준 도우미가 있었다. 그 도우미는 나의 오래된 친구 둘 중 하나로 중학교 1학년 때 나와 짝꿍을 맺은 인연을 시작으로 21년이 지난 아직까지 나의 '절친'이란 타이틀을 유지하고 있는 친구다. 이 친구는 나에게 만화, 판타지 소설, 플레이스테이션 등 여러 가지 것들을 소개해줬는데 그 시절 내 작고 어린 세계는 그 수많은 새로움에 완전히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아마 이 친구가 아직까지 나의 절친으로 곁에 남아있는 이유도 그때 내가 들어 올린 백기와 완전히 연관이 없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쓰기'도 그 수많은 새로운 세계 중 하나였다.
친구의 그 수많은 취향 중엔 나의 취향과 겹치는 것도 있었다. 그건 바로 만화 그리기. 만화라고는 해도 사실 낙서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래도 제법 희소한 아웃사이더적 취미였고 그 희소함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친구와 나는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다. 아마 그 희소한 취미를 가진 이들끼리 짝이 되었다는 것에 어떤 운명적인 로망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함께 그림을 그리며 희소한 취미를 공유하다 보니, 쉬는 시간 짧게 짧게 낙서하는 것만으로는 영 시간이 부족하곤 했다. 몇 날 며칠을 아쉬워하다가 결국 그 부족분을 마저 그리기 위해 방과 후 친구 집으로 가게 되었다. 대충 던진 가방에서 연습장을 꺼내 들고는 한참을 말없이 각자 슥싹슥싹 그림을 그렸던 기억이 난다. 그 자연스럽고 사랑스러운 침묵. 해가 채 떨어지지 않아서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오고, 빛을 등진 먼지들이 하얗게 둥실둥실 떠다니던 친구의 방 안. 나와 친구는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누워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바닥에는 연습장을 깔아 두고, 그 위로 연필 흑연이 굴러가며 내는 소리.
친구의 방에는 참 잡다한 것들이 많았다. 프라 모델, 만화책 몇 권과 만화잡지들, 플스와 게임 CD들, 굴러다니는 판타지 소설책 등. 왜 그렇게 서브 컬처 관련 물품들이 많았는지 궁금했는데, 후일 친구가 자신의 절친한 아는 형을 소개해준 날 그 모든 의문이 해소되었다. 친구는 그 아는 형에게서 서브 컬처적 요소들을 그대로 물려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친구에게서 나에게 대물림 되었고 말이다. 하지만 친구도 그 아는 형에게서 그 모든 것들을 오롯이 물려받기만 한 건 아니었다. 물려받은 것에 더해 새로운 취향을 가미하고 섞고 늘이고 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 날이 그랬다.
"나랑 같이 소설 써볼래?"
친구는 문득 그렇게 말을 붙였다. 그날도 함께 그림을 그리면서 배를 걸레 삼아 그 집 바닥을 닦고 다니고 있었다.
나는 짐짓 놀랐는데, 비록 그 다양하고 많은 취향을 전수받는 중이긴 하나 아직 그 판타지 소설이라는 취양으로는 채 입문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읽기'도 하지 못한 취향의 '쓰기'를 하자니. 걷지도 못하는데 달려보지 않을래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었다. 하지만 친구는 '드래곤의 일기'라는 판타지 소설책을 양 손을 그러모아 쥐고 한껏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므로 그림을 그리던 손을 멈추고 몸을 일으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소설?"
"응."
"그래."
한번 해보지 뭐. 하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별다른 고민 없이 받아들인 일이 나의 인생 전반에 영향을 끼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중요한 것들은 늘 그렇게 실은 대수롭지 않은 척 모습을 위장하고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게 시작된 '쓰기'는 길게 길게 이어졌다. 친구와 나는 입을 꾹 닫고 연필을 꾹꾹 눌러서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밤이 깊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오른 버스 안에서도 그 '쓰기'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고 결국 집으로 복귀하자마자 가방에서 연습장을 꺼내 한참 이어쓰기에 이르렀다. '쓰기'는 그렇게 무지 연습장 4, 5장가량을 채우고서야 끝이 났다. 쉼표를 찍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상당한 시간을 잡아먹고 나온 그 글은 일반적인 판타지라기보단 차라리 RPG 게임의 도입부에 가까운 것이었다. 여행을 떠나는 어린아이들, 마을 입구에서 만나는 늑대 따위가 등장하는, 아마도 영웅전설 3에서 영향을 받았을, 지금 보면 낯부끄러워서 한 장도 채 읽을 수 없을 문장의 연속. 하지만 창작에는 자아도취가 쉽게 꼬리를 물고 등장한다. 아직 이야기의 초입에 쉼표를 찍은 것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무척이나 뿌듯하고 설레고 두근거렸다. 이야기가 얼마나 유치하고 편협하고 단순하고 일직선적인가와는 상관없이 아무튼 내가 만든 이야기였으니까. 나만이 만들 수 있었던 이야기였으니까. 그 자신만만함은 한참을 전화기를 붙들고 친구에게 내가 어떤 이야기를 써냈는지 장황하게 이야기하도록 만들었다. 안방 침대에 누운 채로 그 머리맡에 위치한 전화기를 소중하게 붙잡고 깔깔거리며 오랜 시간 통화했었다. 마치 지금 당장 눈앞에서 내가 쓴 이야기가 벌어지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묘사하면서 말이다. 친구도 질 수 없다는 듯 자신의 글에 대해 일장연설을 펼쳤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친구의 글은 그 당시 친구가 푹 빠져 있던 그 '드래곤의 일기' 형식을 꼭 닮은 글이었다. 일기 형식에, 주인공은 드래곤. 내가 '영웅전설 3'을 모방했듯이 말이다.
시작이 반이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하면 나의 첫 번째 '쓰기'를 대표하는 그 이야기는 절반에서 끝이 났다고 볼 수 있겠다. 그 날 그렇게 열정을 불태운 글은 거기에서 딱 멎어 버렸다. 한 가지에 오래 묶여있기엔 원체 새롭고 즐거운 게 많은 세상이었다. 그래서일까, 그 시절에는 게임 하나 엔딩 보기가 그렇게 어려웠다. 아무튼 내 첫 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 그 소설이 담긴 노란색 푸우 그림이 있던 무지 연습장은 그렇게 서랍 속에 봉인되었고, 나는 그 후로 여러 가지 새 연습장을 샀다. 그리고 그 시점 이후로 판타지 소설에 서서히 빠져들기 시작했다. 판타지 소설을 읽는 경험이 쌓여갈수록 그 날 내가 처음으로 쓴 글의 가치가 나날이 떨어져 갔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결국 내 첫 작품은 그렇게 서랍 속에 담긴 채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