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어른 진짜 최종본 final'을 수정해볼까

1일 1커밋 #63

by 김디트

계획은 중요하다고,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뭐 그래 봤자 신체는 소중히 다뤄야 한다, 잠은 일찍 자야 한다 같이 붕 뜬 감상만 있을 뿐이었지만. 그 붕 뜬 감상, 그리고 어설픈 이해도는 훗날 큰 후회를 낳게 되는데.. 아무튼 금과옥조로 삼아야 할 말들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계획 세우는 게 중요하다는 것도 그랬다. 실은 계획을 세우며 살아가는 어른이 주변에 없었기 때문에 단지 개념적으로만 막연히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보여주기 식으로, 정말 실천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그때 계획을 세우는 것이겠지. 아마도 일상을 사는 데는 계획 수립 같은 건 전혀 필요 없는 일인 모양이야. 이런 식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른 조언들처럼 단지 개념으로만 막연히 남은 채 내 의식 저 편으로 사라졌다.


렇게 시간이 흘렀다. 어른이라면 당연히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하고, 그런 일상을 그냥 막연히 흘려보내면 된다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은 훌쩍 지난 후였다. 어른이 바로 내 인격의 완성형이라고 믿었던 그 시절들은 어른이라는 상황이 막상 닥쳐오니 그대로 모두 부정되었다. 마치 최종본, 진짜 최종본, 진짜 최종본 final..하고 이어지는 디자인 시안 같았다. 이제 어른 진짜 최종본 final을 고쳐야 하는 셈이다. 그 수정의 결과로 이젠 상처가 잘 낫지 않게 되었고, 머리카락 모질이 얇아져서 걱정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최종본에서 바뀌는 것들은 비록 부정적일지라도 주로 외적인 요소들. 그 외, 내적인 요소들은 너무나 변함이 없어서 내가 어른이라는 사실을 굳이 상기하지 않으면 곧잘 까먹곤 했다.


아마 그런 불안감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늘 다음 스탭이 있었던 시절이 지나고 나니 난 어른이 되어 있었고, 또한 조급했다. 취직을 하고 난 후에는 장기적인 목적이랄 것이 없었다. 적어도 누가 세워준 건 없었다. 완성이라는 것이 더 이상 목적을 세울 필요가 없다는 의미라면, 어찌 보면 난 이미 그 시절에 바라던 어른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내적으로는 거의 변함이 없었으니까. 과거의 내가 바랬던 골인 지점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확실히. 그러니 도리가 없었다. 다음 목표를 스스로 만들어서 내가 원하는 골인 지점에 닿을 수밖에는 말이다.


하지만 막상 시작하려니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목표를 세운다? 지금에 와서 동그란 원을 그린 후 거기에 뭘 채울까 고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뭐든 배울 때는 일단 해보는 게 답인 경우가 많았다. 우선 뭘 해야 할까. 내가 될 미래를 그려보자. 하여 '프로페셔널한 프로그래머 되기' 하는 큰 목표는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는 방법이 없었다. 그냥 노력해보는 수밖에. 그냥 꾸준히, 천천히 해보는 수밖에. 공부든 프로젝트든 삶이든.


그리고 또 시간이 흘렀다. 나는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는 목표의 산 중턱에 걸터앉아 숨을 몰아 쉬었다. 내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계획을 세워서, 최적의 길은 아닐지라도 꾸준하게 올라왔다. 하지만 오르면 오를수록 다음 목표는 가까워지긴 커녕 멀어지기만 했다. 원래 입문할 때 생각했던 것보다 마스터하는 데 드는 비용은 기하급수적이라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마냥 멀어지기만 한다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건가? 계속 추구해도 되는 건가? 주저앉아서 시작된 의심은 무거워진 내 발을 잡아끌었다. 그래서 난 꾸준히 해 나가던 관성까지 잃어버리고 말았다.


도저히 일어날 힘을 낼 수 없을 것 같은 상태가 지속되었다. 일어날 수만 있다면 뭐든 할 텐데. 얼마 전의 그 관성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다시 올라갈 힘과 목표의식을 찾을 수만 있다면 정말 뭐든 할 텐데. 하지만 막상 일어날 수 없었다. 나는 숨 쉬며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만 힘을 낼 뿐, 죽은 듯이 지냈다. 애써 앞에 펼쳐진 길을 외면하면서. 눈 앞에 숙제처럼 쌓인 책을 몇 글자씩 힘겹게 읽어 나가면서. 회사에서 월급 루팡 소리를 듣지 않을 정도로만 일하면서. 그렇게 눈 앞의 것들만 전전긍긍, 겨우 쳐내면서 살아 있었다. 말하자면 번아웃 증후군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몇 글자씩 소화해 나가던 책이 말했다.


좋은 소식도 있다. 탈진을 치유해주겠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는가? 그럼 시작해보자. 사실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다. 준비되었는가?
벽을 넘어라.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냥 그렇게 넘어야겠다 생각하면 넘을 수 있는 거냐고. 나는 투덜거리면서 흘끗, 내 앞에 아직 펼쳐져 있는 길을 바라보았다. 나는 생각했다. 뭐든 할 텐데. 다시 목표를 향해 걸을 수 있으면 정말 뭐든 할 텐데. 근데, 뭐든 할 수 있다면 그냥 일어나서 걷는 건 왜 못하는 것일까.


문득 그렇게 생각했고, 이번에도 난 헛웃음을 지었다. 몸을 일으켜서 걷기 시작하는 게 이렇게 쉬운 일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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