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벚꽃, 그리고 애인
1일 1커밋 #72
요새 왠지 몸이 가벼웠다. 발을 통통 굴려보면 그 산뜻한 가벼움은 더 뚜렷해진다. 컨디션이 일신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몸무게가 부쩍 빠진 것도 아닌데 뭘까. 조금의 의아함을 품고 통통. 그러다 슬쩍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지나가는 이 덕에 이 정체 모를 가벼움의 정체가 슬며시 드러났다. 나는 봄바람이 마구 헝클여놓은 머리카락을 정리해야 했다.
옷이 가벼워진 만큼 마음도 가벼워졌다. 뭐 그랬다면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도각거리며 키보드를 누를 게 아니라 봄에 취해서 노곤 노곤 꾸벅꾸벅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않았다. 옛날에는 쉽게 쉽게 찾아오던 춘곤증마저 없는 걸 보면 아마 그 춘곤증이란 놈도 목이 잔뜩 굳어있고 여러모로 마음이 무거운 사람 같은 건 좀 피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그런 무거운 상상을 하면서 한숨을 피유 쉬었다.
어느덧 4월에 접어들었다. 벚꽃이 만개했다 싶었더니 금세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래서 난 마음이 조금 조급했다. 매년 벚꽃이 피는 날이면 애인의 집 앞 벚꽃길을 걸으면서 조곤 조곤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느새 연례행사처럼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애인은 벚꽃의 비읍 정도만 봐도 '올해도 벚꽃길 걸어야 하는데.' 하면서 운을 떼곤 했다. 그러니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 벚꽃에 조급할 수밖에.
마침 서울시장 투표일이었다. 정말 여러 가지 의미로 고민이 많은 투표였지만, 그리고 결과가 이미 대충 예견되는 투표였지만, 아무튼 주어진 권리를 냅다 바닥에 내던질 수는 없는 일이었고 그래서 휴가를 사용했다. 손소독제와 비닐장갑을 끼고 투표용지에 도장을 찍고 나니 그걸로 끝이었다. 참 봄과 어울리지 않는 일이구나 뭐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애인을 얼른 만나고 싶었다.
날씨가 정말 좋았다. 햇살의 양과 바람의 따뜻함이 너무 적절해서 실외였지만 마치 적정 실내 온도를 맞춘 쾌적한 방에라도 들어선 느낌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월드컵 경기장으로 향했다. 이런 날씨에 늘 가던 음식점과 카페나 전전하는 것은 정말 직무유기에 가까운 일일 테니까.
애인은 신이 나서 새우깡이며 감자깡이며 집어 들었다. 나들이를 갈 때는 과자가 필수라고 했다. 전통적으로 그래 왔다는 걸 어필하기 위해서일까, 애인은 새우깡을 전통 과자 코너에서 찾으려 들었고 그래서 나는 깔깔 웃어야 했다. 물론 전통 과자 코너에 새우깡이 있진 않았지만 그 언저리에 있긴 했다. 그 언저리에 있는 그런 나들이를 하겠구나 그런 예견을 하면서 새우깡을 와삭거리며 먹는 애인을 바라보았다.
문화 비축 기지는 조용했다. 하지만 시끌벅적했다. 그 공간의 넓이 대비를 따지자면 전체적으론 조용한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시끌벅적한 곳은 정말 시끌벅적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우리와는 멀었기에 잘은 모르겠지만. 문화 비축 기지에서는 예능인지 뭔지를 촬영하고 있었다. 애인은 뭘 촬영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그 근거로 활용될 것이 너무 적었다. 결국 애인은 이내 포기하고 새우깡의 뒤를 이은 감자깡 봉지에 연이어 손을 집어넣었다.
넓은 공간인 만큼 넓은 자연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이전에 왔을 때와는 또 조금 달랐다. 그때는 뭔가 공사를 하고 있었고, 카페가 열려 있었고, 코로나가 기승을 떨치기 전이었다. 하지만 햇살이라거나 벚꽃이라거나 옆에서 가만히 휴대폰을 바라보며 그의 말 따나 '쿠키런에 밥 주며' 앉아있는 애인이라거나 하는 것들이 참 생경하게 즐거웠기 때문에 실눈을 뜨고 히죽거리며 과거가 아닌 현실을 즐길 수 있었다.
벚꽃이 참 많았다. 이상하기도 하지. 애인을 바래다주며 걸었던 애인집 앞의 벚꽃길은 이미 제법 시들어서 초록색 반, 분홍색 반이었는데 그곳의 벚꽃들은 마치 우리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생생하고 부드러웠다. 애인은 흩날리는 벚꽃잎들을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바라보맜다. 나도 입을 벌려가며 벚꽃잎들이 휘몰아치는 것을 함께 바라보았다.
그렇게 몇 차례의 휘몰아치는 벚꽃잎들을 보고 나니 어느새 마음이 옷차림에 맞는 무게가 되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