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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디트 May 15. 2021

모여있는 책들 앞에서

1일 1커밋 #91

  책이 쭉 늘어서 있는 광경을 마주하면 왠지 가슴이 벅찬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 책들 모두 내가 채 읽을 수 없는 문자들로 가득 들어차 있다 하더라도 그럴 것이다. 아무거나 손에 쥐고 파라라락 책장만 넘기더라도, 알아볼 수 있는 문자 하나, 그림 하나에도 신나 할 자신이 있다. 책장 사이사이에서 풍겨올 종이 냄새, 햇빛에 바랠 걸 걱정해서 어둑하게 조성된 서늘한 공간. 왠지 가만히 상상만 했을 뿐인데 몸에 힘이 쪽 빠져나가면서 목욕이라도 하고 나온 것처럼 나른해진다.

 

  돌이켜보면 아직 몸집이 작은 아이였을 때부터 복수의 서적을 앞에 두고는 늘 이런 가슴 벅참이 있었다. 이모에게 물려받은 오래된 이야기책들이 우리 집 작은 방의 책장에 가득 들어차 있던 기억은 아직까지 무척 선명하다. 그 앞에서 두근거리던 마음도. 그렇게 많은 책들이 있었지만 난 내가 애정 하는 책 몇 권만 주야장천 읽었었다. 왠지 이야기가 고파질 때면, 몇 번을 돌려 읽어서 너저분해진 책을 또 끄집어내어 침대 위에 읏차, 쓰러지곤 했다. 아마 그 시절들이 내 목이 거북 목화하는 데 일조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한참 자라서 이제 그 책들을 거의 펼쳐보지 않게 되고 난 후로도 사촌에게 물려줄 때가 되자 영 흔쾌한 마음을 먹을 수 없었다. 나름대로 이미 거의 어른에 근접하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가득한 시기였기도 해서 흔쾌한 척할 순 있었지만 아마 엄마는 나의 그 떨떠름한 감정을 확연히 알아채고 말았겠지. 그런 걸 돌이켜 보다 보면 수많은 책들에 압도되면서 흥분하는 이 마음 역시 소유욕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북을 읽으면서 '편한데 뭔가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의 근간도 그렇고.


  그래서일까 대학교 때는 뭔가 마음이 빈 것 같은 기분이 들면 자주 도서관에 들르곤 했다. 일정한 규칙과 간격으로 늘어선, 주로 오래되고 이따금 새로운 책들을 마주하고 있으면 마음속에 드문 드문 비어 있던 곳이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보면 기분뿐이었지만, 결국 그러다 보면 책을 집고 훑어보고 대출하고 하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마음이 차올랐기도 하고. 더군다나 도서관은 다른 곳들과는 다르게 더 엄중한 규율 아래에 움직이는 곳이다. 마치 신관처럼 고개를 조아리며 성스러운 포즈로 줄이며 글자를 새겨 나가는 사람들이 가득 모여있는 곳, 마치 책들의 성당이 있다면 바로 도서관이 아닐까 싶었기 때문에 마음 정리가 더 수월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모여있는 책은 사실 심미적인 가치는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 이상 큰 의미가 될 수는 없었다. 어릴 때도 그랬고, 대학교 때도 그랬지만 그 무수한 책 중에서 콕 하나를 집어 내는 선택을 내려야 했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선택의 폭은 무한히 넓어졌고, 그만큼 난이도는 올라갔다. 어릴 때 침대 위에서 쉽사리 꼼질거렸던 것이 이제는 큰 마음을 먹지 않으면 힘든 일이 되었다는 건, 그 사실 만으로도 제법 씁쓸한 일이었다. 하염없이 책 앞을 서성거리다가 결국 선택하는 걸 포기하는 빈도가 늘어났다.


  그러다 발견한 유용한 사실 하나. 읽을 책을 선택하는 것보다는 나중에 읽을 책을 집에 쟁여놓는 쪽이 좀 더 마음에 부담이 덜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서점을 종횡무진하며 천천히 하나하나 내가 읽고 싶은 것들을 사모았다. 이 프로그래밍 언어는 요새 핫하던데, 어디 한번 배워볼까. 하며 한 권, 법률 쪽은 기초 지식 정도는 알아두면 좋지 않을까. 하며 또 한 권. 당연하지만 그런 쉬운 선택들은 결국 나중에 그 책들을 집어 들고 읽을 나에게 또 다른 부담감을 유예하는 일이었는 데다가, 집의 공간도 야금야금 침범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결국 이제는 책 구매를 위한 선택도 운신의 폭이 무척이나 좁아지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집의 책 무더기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벅차면서도 부담감이 생기는, 복잡 미묘한 심정이 되고 말았다. 날이 갈수록 소화하는 책 보다 소화하고 싶은 책들의 분량은 많아지니 큰일이다, 참 큰일이야. 하고 중얼거리는 게 일상이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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