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엔 배도 뜨는데 서핑이라고 못할까

1일 1커밋 #93

by 김디트

바다는 푸르렀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이 말 외에는 딱히 첨언할 것이 없을 정도로 정말 푸르렀다. 그러니까 내일이면 저 바다 위를 서핑 보드로 촤르륵 가르게 될 거란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니 더 푸르렀다. 푸른 만큼 상큼하고 아찔하게 차가울 것 같았다. 배 위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채, 몰아치는 바닷바람을 등지고 앉아서 그리고 정면으로는 반짝반짝 샛노란 햇살을 맞으면서 천천히 제주도로 향했다. 함께 여행 가는 사람들과 함께 모여 앉아서 웅성거리며, 이 배의 시속은 얼마일까를 유추하면서, 검색하면서, 겨우 30킬로가량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에 놀라면서 그렇게 바다 위를 부유했다.


배 가장자리는 바람이 너무 거세게 불어서 쉽사리 다가갈 수 없었다. 바다를 날래게 가르는 배의 하단부를 확인하는 건 고사하고 가장자리에 서서 사진 한 장 촬영하는 것도 어려웠다. 손을 떼면 바로 바다로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모자를 꽉 부여 쥐고 힘겹게 몇 장의 사진을 남기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결국 이 커다란 배가 정말 바다 위를 가르면서 나아가는지 육안으로 확인하는 건 실패하고 말았다. 이렇게 크고 넓고 수많은 것들을 실은 것이 바다 위를 떠서, 심지어 앞으로 나아간다니. 믿어지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강렬하게 믿어졌다. 이 세상엔 바다 위로 뜨지 못하는 게 거의 없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신앙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바다 위로 떠오르는 것들을 믿었다. 바다 밖에서는 그 위로 둥실 떠오르는 것 외엔 보지 못하기 때문일까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 날, 실제로 바다에 풍덩 뛰어들고 난 후에는 조금 싸늘한 심정이었다. 바다로 향하는 아침만 해도 착 달라붙는 날렵한 서핑 슈트를 차려입고 몸보다 조금 큰 서핑 보드를 날렵하게 이리저리 조향 할 생각에 마음이 붕 뜬 상태였다. 하지만 늘 그렇듯 상상과 실제는 이번에도 괴리가 컸다. 나는 체격보다 커서 얼핏 잘못 보면 조거 팬츠가 아닐까 싶은 서핑 슈트를 빌려 입고 스티로폼을 대충 물고기 모양으로 자른 것만 같은 초보자용 롱보드를 옆구리에 힘겹게 낀 채로 리시를 목에 걸고 백사장 위를 낑낑거리며 걸었다. 날씨는 따뜻한 편이었지만 바다는 아직 차가웠다. 발만 담갔는데 온 몸이 쭈뼛거렸다. 찬찬히 걸음을 옮기면서 심장 부근에 찹찹찹 바닷물을 적셨으나 별로 큰 도움은 안 되는 것 같았다.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파도를 탈 적당한 위치로 이동했다. 이내 서핑 강사님의 손길과 파도를 타고 해안을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나는 아까 물가에서 배운 대로 착실히,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인간은 특유의 균형 감각으로 세상을 지배했다고, 그러니 균형 감각은 타고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인간에게는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고 누군가가 말했는데. 하지만 나는 식은 죽도 먹기 힘들어하는 돌을 갓 지난 어린 아이나 다름없었다. 아크로바틱을 하는 모양새로 공중을 걷어차며 바닷속으로 풍덩 빠졌다. 꼬르륵. 배도 뜨는 바닷속으로 꼬르륵 가라앉았다가 땅을 짚고 어푸푸 일어났다. 그러니 그만 싸늘한 심정이 될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걸 배우는 건 언제나 즐거웠다. 일단 새롭다는 점이 가장 즐겁다. 아마 상상의 여지가 있어서가 아닐까. 이 새로운 것을 완벽하게 해내는 나의 모습.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요리조리 가지고 노는 나의 모습.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드레날린이 빵 하고 터지는 기분이다. 현실은 가만히 보드 위에 누워서 패들링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리고 재미있는 점 또 한 가지. 그건 바로 가장 쉽고 간단한 것들부터 배워 나간다는 점이다. 컴퓨터를 처음 배우는 사람이 키보드 위에 손을 얹는 법, 마우스를 쥐는 법부터 배워나가듯이, 나 역시 보드 위에 눕는 방법, 가슴을 세우고 패들링을 하는 방법, 오른발을 무릎까지 끌어올리고 왼발을 노즈 쪽으로 쭉 뻗어 놓는 법 같은 가장 기초적인 것들부터 습득했다. 그런 쉽고 간단한 기초들은 쉽게 체득할 수 있으니까, 단 하루 만에 쑥쑥 나아질 수 있으니까 재미가 없을 수 없었다.


서핑은 그야말로 새로웠고, 그래서 재미있었다. 그 날은 하루 종일 하나, 둘, 셋, 구령에 맞춰 파도 위에서 몸을 일으키는 연습을 했다. 쉼 없이 연습하기도 했지만 쉼 없이 선크림을 바르기도 했고, 쉼 없이 먹기도 했다. 그래서 바다 위에는 배도 뜨는데 난 왜 못 뜨는가 같은 싸늘한 심정은 점차 파도에 휩쓸려 사라져 갔다. 아니, 수온이 낮아서 몸이 와들와들 떨린 탓에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던 걸지도 모르겠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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