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규뉴 Dec 22. 2021

Shut up and Focus

집중하지 않으면 크리스마스는 그냥 지나가 버릴 거야

올해 크리스마스는 정 없게도 토요일에 찾아왔다. 새삼 갑작스러운 일도 아니고, 이미 예견되어 있는 일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달력에게 서운함이 찾아온다. 오려면 하루만 더 일찍 오지? 늦게 오려면 좀 더 늦게 오든지... 돗자리를 골라줄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니 그저 즐겨야 한다. 토요일, 우리의 크리스마스를.


문득, 첫째를 낳은 후 한 번도 서울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삭의 몸으로 고향인 대구에 내려가 첫째를 낳았고, 첫째가 100일이 될 때까지 친정 살이를 했다. 집 근처에서 조리원을 다녔고, 조리원을 나와 돌아온 친정에는 산타클로스 인형이 대롱대롱 달린 가랜드가 우리를 반겨 주었다. 12월 25일은 아빠의 생신이기도 했다. 첫째가 태어난 해는 아빠의 환갑이었다. "너, 나랑 동갑이네!" 아빠는 생후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첫째를 안고 성탄절 함박웃음을 지으셨다.

그 이후로 매년, 우리는 연말이 되면 작정한 듯 친정을 찾아갔다. 크리스마스트리를 사고 싶어. 매년 노래를 불렀지만 그 소원은 귀찮다는 이유로, 번거롭다는 이유로 매번 (스스로에 의해) 반려되었고, 대신 친정 커다란 거실 한편 조그마한 트리가 자리 잡았다. 그렇게 조금씩 친정에 자리 잡은 '크리스마스 장식'은 한 군데 뿌리를 내린 이래 다시는 떠나지 않고, 사시사철 크리스마스를 상기시켜 주었다. 방금 크리스마스가 지나갔어, 하지만 곧 다시 돌아올 거라고.


붙박이 크리스마스 장식은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어서, 크리스마스트리 대용으로 문 앞에 달아두었던 리스는 봄이 되고 여름이 되도록 걷어낼 생각이 없었다. 반짝이 불까지 들어오던 리스. 겨울에는 재미 삼아 몇 번 껐다 켜다가는 이내 잊어버리곤 했다. 다시 돌아온 12월, 그 사이 건전지는 계절을 버티지 못한 채 방전되어 버렸고,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새 건전지를 갈아 끼웠다. 그리곤 또다시 건전지 빼는 것을 잊고... 리스는 그대로 '방치'되곤 했다. 그 리스는 우리의 이삿짐이 되어서야 비로소 현관문을 벗어났다.


그렇게,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것,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정리하는 것은 노동의 일환이었다. 12월 24일이 되기 전 꾸밀 물건들을 추리고, 구입하고, 장식한 뒤 새해가 지나기 전 다시 정리하는 것. 그것은 충분히 '귀찮다'는 한 마디로 미뤄질 법했다. 그럴 시간이 없어. 그럴 생각이 별로 없어. 어설프게 장식했다가는 더욱이 안 하느니만 못한 꼴이 될 것이다. 시간과 여유가 없다는 것, 그것만으로 내가 크리스마스를 즐기지 않는 데엔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올해 크리스마스만은 달랐다. 가장 다른 점은, 바로 우리가 서울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낸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실 내가 결국 참지 못하고 190cm의 장신 크리스마스트리를 '지른'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매년 크리스마스트리를 사지 않을 이유가 너무 많았지만, 올해는 어떻게든 분위기를 내보고 싶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나의 트리. 너의 파티(?). 그렇게 가볍게 인터넷을 뒤져 적절한 가격대의 크리스마스트리를 골라 배송받았다. 그것은 상당히 '저렴한', 진짜 솔직히 말하자면 정말 싸구려 트리였다. 진짜 좋은 트리는 이파리가 솜처럼 보송보송한 것이라는 걸 뒤늦게야 알았고, 잘 알아보지도 않은 채 구매한 나의 트리는 마치 색종이를 엮어놓은 듯 이파리 끝자락이 네모져 있었다. 살짝만 건드려도 눈송이로 위장한 하얀 페인트와 네모진 이파리들이 송송 떨어졌다.

트리의 퀄리티가 어떻든, 가장 만족스러운 은 바로 '우리 집에도 트리 있다'는 사실이었다. 오너먼트가 모자라 약간 어정쩡한 트리 앞에서 다 같이 사진을 찍었다. 나는 곧바로 오너먼트들을 추가 주문했고, 역시나 뭔가 어설퍼 보이는, 건드릴 때마다 반짝이가 사정없이 떨어지는 오너먼트들을 조심스레 트리에다 하나 둘 걸었다. "이것만 사고 안 살 거야." 남편은 나의 트리에 대한 집착(?)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집 안에 물건이 자꾸 생기는 것이 썩 탐탁지만은 않은 듯했다.


그렇게 우리 집에 9척 장신의 반려 트리를 맞이하면서, 매년 연례행사처럼 결정했던 친정 방문 일정을 일주일 뒤로 미루게 되었다. 트리와 함께 성탄절을 맞이하고 싶어. 엄마에게 이번 크리스마스는 서울에서 보내겠노라 얘기했을 때, 내 말을 관통하는 한 마디는 그것이었다. 마치 남자 친구와 크리스마스를 보내겠다는 미혼의 여성(?) 같은 어투였고, 엄마는 마치 정말로 그런 말을 들은 듯한 반응을 보이셨다. "아빠 생신인데 안 온다고!" 하지만 성탄절이기도 한 걸. 아마 예수님이 먼저 태어나시지 않았을까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태도가 중요하다)


12월이 시작되자마자 맞이한 나의 반려 트리. 아침에 일어나서 트리의 불을 켜고, 출근할 때 불을 끄고. 퇴근하자마자 불을 켜고, 자러 들어가기 전에 불을 끄고. 등대지기의 삶처럼 나는 트리의 불을 껐다 켜며 나름대로의 무드를 만끽했다. 가끔은 거실 불을 모두 끄고 트리의 불빛만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을 때도 있었다. 청소 한 번 해보겠답시고 매트를 전부 걷어냈다 어설프게 세워둔 매트가 넘어지면서 트리를 덮쳐, 안 그래도 어설픈 내 트리는 마치 원형 탈모가 온 듯 중간이 뻥 비어 버렸고, 남편은 완력으로 트리 가지를 다시 꺾어 못난 구멍을 가렸다. 그냥 두 배 돈을 더 주고라도 더 좋은 트리를 살 걸 그랬나.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애초부터 나의 고민은 가격대가 아닌 트리 존재 자체의 유무였다는 것을 상기하며 엄마미소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래, 너는 없을 뻔했던 존재야.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족해.


그렇게 트리를 들이면서, 나는 시나브로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꾸밀 만한 것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턱없이 짧은 길이의 눈송이 라이트. 아침이 되면 한쪽이 떨어지는, 자리 선정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 크리스마스 가랜드. 자꾸만 넘어지는 카카오 프렌즈의 춤추는 루돌프 인형. 첫째의 공작 놀이로 샀지만, 의외로 퀄리티가 너무 좋아 어느새 부엌 한편을 차지한 스티로폼 크리스마스트리와 산타 마을. 아무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아무도 느낄 수 없겠지만, 그렇게 나는 (어찌 보면 그냥 토요일이었을지도 모르는) 크리스마스를 기대하고 있는 중이었다.


12월이 속절없이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위드 코로나의 뜻이, 코로나와 진짜로 함께한다는 뜻인 줄은 누가 알았을까? (당신도) 위드 코로나가 될 수 있다는 뜻인 걸까? 그런 의심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회사에서 동료들과 함께 밥을 먹는데, 후배가 물었다. "대리님은 크리스마스 때 뭐 하실 거예요?" ".... 아무 계획도 없는데요." 그리고 불현듯 깨달았다. "근데 저, 올해 대형 트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시청 앞 교회 이름을 크게 내걸어 놓는 트리. 올해 신세계 백화점 장식이 그렇게 예뻐서 저녁에 사람들이 몰린다던데. 판교 현대 백화점 트리는 너무 크고 예뻐서 친구 커플은 삼각대까지 이고 사진을 찍으러 갔단다. 오래간만에 갔던 여의도 IFC 몰에는 트리는 없고 웬 케첩을 층층이 모아 대형 케첩을 전시해 두었었지(사랑해요 하인즈 케첩). 무엇보다 저녁에 나갈 일이 없으니 점등된 트리를 볼 일은 더더욱이 없었다. 습관처럼 쓸어내리는 인스타 속에서 봤던 예쁜 트리와 장식들. 나는 그것들을 매일매일 핥듯이 보며, 마치 내가 그것을 '진짜' 본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나는 또다시 깨달았다. 우리 집의 작은 크리스마스트리가, 나의 공허함을 조금 채워주고 있었다는 것을. 어느새 가구처럼 느껴졌던, 우리 집에 함께한 지 얼마 안 된 그 트리를 바라보며 남편이 "있으니까 좋네."라고 넌지시 내비쳤던 그 트리가, 그렇게 외부의 크리스마스 분위기와 단절된 나를 간신히 이어주고 있었다.


다음날, 첫째의 손을 잡고 유치원을 가는 길에, 아이가 말했다. "우리도 쿠키 구워요." "음 우리 집엔 오븐이 없어서 구울 순 없을 것 같은데." "그럼 YY이 이모네 집 가서 하면 되지." "음... 좀 더 생각해 보자. 그렇게 우리끼리 정할 순 없어." 아이는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트리 모양 쿠키가 먹고 싶어요. 그래, 크리스마스에는 쿠키지. 일주일 전부터 트리 모양 쿠키, 진저브레드 쿠키 등을 검색하며 고민했던 날 떠올렸다.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인터넷 창을 꺼버렸더랬다. 부랴부랴 다시 검색해 보니, 역시나 임박해 오는 크리스마스에 모두가 배달 마감을 선언해두었다. 맘 카페에 수소문을 하고, 정보를 얻어낸 동네 카페에 전화를 걸어 남아 있는 쿠키 십여 개를 키핑 했다. 맛도, 모양도 모른 채였다. 진저 브레드 맨이 트리를 달고 있어요. 눈사람도 있고요. 내가 아는 정보는 그것뿐이었다.


올해가 가기 전, 대형 트리를 볼 수 있을까? 얼마 전의 나는, 갑자기 보고 싶어진 <나 홀로 집에> 영화를 찾아 가입한 OTT와 TV 서비스를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다. 나에게 크리스마스의 계획을 물어보았던 후배는 그 얘기를 듣고 "디즈니 플러스에 있어요."라고 귀띔해 주었다. 조만간 디즈니 플러스의 '무료 구독' 기간 동안 <나 홀로 집에>를 찾아볼 생각이다. 나는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크리스마스를 느끼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정신 차려, 집중하지 않으면 크리스마스는 너도 모르게 지나가 버릴 거라고. 그리고 난 절대 그렇게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지 않다고, 조그만 지팡이 사탕을 흔들며, 매일매일 강박처럼 캐럴을 들으며 생각한다. 내가, 나의 공간에서 있는 힘껏 산타 클로스의 숨결을 느끼게 해 주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