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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규뉴 Oct 22. 2021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사 먹는 커피로 느끼는 특별한 하루

간만의 휴가가 생겼다. 9월과 10월은 추석과 휴일이 많아 연차를 아끼고 있었는데, 사실 휴일은 아이 있는 가족에게는 즐겁기도, 곤혹스럽기도 한 날이다. 특히나 9, 10월은 죄다 연휴였었지. 우리의 연휴(들)는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시간을 때울지를 궁리하며 꾸역꾸역 지나갔다.

쉬는 날은 많았는데, 내가 진짜 쉬긴 한 건지 의심이 가던 차에 드디어 오롯이 혼자가 될 수 있는 휴가가 생긴 것이다. 전날부터 마음이 설렜다. 뭘 하지? 오전은 뭘 하며 보내고, 오후에는 무얼 해야 이야 이 녀석 멋진 휴가를 보냈다고 소문이 날까? 또렷한 계획조차 없이 휴가 당일이 되었다.


아이들을 하나씩 등원시키고, 남편의 출근을 지켜보고, 널찍한 집에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혼자만의 시간이 묵묵히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시간은 오전 8시 반을 조금 넘겼다.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이제... 뭘 할까?


사실 난 요즘, 혼자만의 조용한 캠페인을 하고 있다. 이름하야 '커피 안 사 먹기 운동.' 커피를 팔에 직접 쏘아도 카페인이 모자란 현대의 직장인으로서 무슨 소리인가 하겠지만, 말 그대로 카페의 사천 원~오천 원에 육박하는 커피를 사 먹지 않는다는 소박한 운동이다. 회사에는 커피 머신이 있으니 텀블러 가득 얼음을 담아 내려 마시면 되는 것이고, 집에도 전동 캡슐 머신을 두었으니 개당 700원 정도 하는 캡슐만 부지런히 쟁여 둔다면 주말에도 양질의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도 깔려 있는 판 속에, 매일매일 이것을 지키기는 쉽지 않다. 벅찬 출근길, 방금 점심을 먹어 나른한 1시 반, 또는 주말에 아이들과의 푸닥거리로 이미 지쳐버린 이른 아침, 나는 이상하게 혼자만의 싸움을 하게 된다. '커피... 사 먹을까?' 몇 번의 손짓만으로 맛있는 커피를 스스로 만들 수 있는데(심지어 나는 커피 맛도 잘 구분하지 못한다), 누군가가 직접 기계에서 쏘아 내린 샷과, 공장에서 만들어져 쉬이 녹지도 않는 얼음이 담긴 커피가 당기는 것이다.

사실 직장인들에게, 아니 좀 더 범위를 좁혀... 나에게 사 먹는 커피는 그래서 나름대로의 큰 의미가 있다. 내가 충분히 해낼 수 있음에도  '굳이 굳이' 돈을 들여, 남의 손을 빌려 얻어낼 수 있는 가장 최저가의 사치. 예전에 그런 글을 본 적이 있다. 하루에 한 잔 커피값을 아끼면 1년에 200만 원 가까이 절약할 수 있어요. 나는 코웃음 쳤다. 이렇게 성실하게 일하는데, 커피 한 잔 정도는 사 먹게 해 주지, 좀. 그런데 주변에 충분히 커피를 타 마실 수 있는 환경이 정착되자 조금씩 내 맘도 변하기 시작했다. 그래, 어차피 같은 커피인데. 직접 내려먹으면 좀 어때?


처음엔 하루 5천 원 아끼는 재미로 시작했다. 커피 한 잔 값을 아낀 날엔 휴대폰 위젯의 to do list에 저장해 둔 '커피 값 절약(5천 원)'의 버튼을 꾹 눌러 새파랗게 바꾸었다. 회사에서 동료들과 점심을 먹고, 후식처럼 카페에 가는 날엔, 그것이 잘못이 아님에도 혼자 반성했다. 주말엔 위기가 자주 찾아왔다. 아이들과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카페에 가는 날이 많았고, 카페에 가지 않더라도 괜스레 일요일 아침엔 투명한 돔이 씌워진 플라스틱 컵에 담긴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간절히 당겼다. 그럴 땐 마치 나에게 선심이라도 쓰는 듯 테이크아웃을 해오거나, 좀 더 사치를 부릴 땐 굳이 배달비까지 들여 가며 주문하기도 했다. 그런 날은 엄청난 과소비라도 한 양 몸과 마음이 빵빵해졌다.


사 먹지 않는 커피가 기본인 일상을 살기 시작하자, 조금씩  변화가 찾아왔다. 커피 한 잔 테이크아웃을 해 출근하는 날, 또는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시켜 멍하니 앉아있는 평범한 날들이 아주 특별한 날이 된 것이다. 새벽 기상이 유난히 힘들었던 평일, 함께 출근하는 남편에게 "오늘은 커피를 사 가야겠어."라고 말하는 것이 '나에게 보상을 좀 내려야겠어'라는 의미가 된다거나, 오늘처럼 아무 계획이 없는 날, 캡슐 커피를 양껏 두 개를 내리고, 얼음이 잘 녹지 않는다기에 큰맘 먹고 장만한 텀블러에 얼음을 한가득 담아 마시는 것도 좋지만, '오후에 카페 한 번 가 볼까' 하고 생각하는 게 사실은 '오래간만에 사치 한 번 부려볼까?'의 뜻이 된다거나.

그런 의미에서, 나는 휴가를 맞아 아주 큰 사치를 부려보고자 일부러 버스를 타고 번화가의 어수선한 카페에  것이다.

 

잘 모르는 맛의 커피를 마시면서, 이어폰 밖의 웅성웅성한 사람들의 대화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시간을 보낸다. 최고로 호화로운 시간. 사 먹는 커피 한 잔이, 나를 이렇게도 복에 겨운 사람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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