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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진 Apr 28. 2021

[왓챠 영화] 러브 미 이프 유 데어

Love Me If You Dare, 2003

스포가 있습니다.


*


사랑이 무엇이라고 딱 정의내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우리가 우정이라고 생각하고 지나쳤던 수많은 감정들이 사실은 사랑이었고, 사랑이라고 생각해서 파고들었던 감정이 사실 사랑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때때로 동정과 연민을, 호기심을, 소유욕을 사랑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실체는 무엇일까.


나는 언제나 <마미>의 대사처럼, "내가 제일 잘하는 게 사랑"이라고 말하고 다니지만 사실 그게 사랑이라고 확언하기는 곤란하다.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사랑을 받았다고 느껴야 사랑이지, 내가 "이건 사랑이야!" 하고 내던진다고 사랑은 아니다. 


수많은 관계가 그런 사랑 때문에 망가진다. 내가 사랑한다는데, 내가 사랑하니까, 너는 내가 주는 사랑을 받기만 하면 되는데, 라는 식의 폭력적인 사랑. 반대로 사랑을 요구하게 되는 쪽은 자주 비참해진다.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사랑. 세상에는 수만가지 모양의 사랑이 있다. 사랑은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슬픔과 절망과 좌절 쪽을 보장하는 편이다.


<파우스트>의 메피스토가 영혼을 가져가는 대신 파우스트가 원하는 쾌락을 이루어주어야 한다면, 사랑은 영혼도 뺏기고 상대가 원하는 만큼 즐거움도 주어야 하니 영 머뜩치 않은 거래다. '가성비'라는 말은 너무 싫은데, 사랑이야말로 가성비 떨어지는 인간의 감정이다. 인간은 어리석으니 알면서도 멈출 수 없다.


대학생 때, 내가 좋아하는 애한테 뭘 해주고 싶어서 공장에서 부품에 스티커를 붙이고 연회장에서 접시 6개를 동시에 들고 나르고 밤새도록 찌라시를 돌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짓거리 안 하고 집에서 공부나 하든지, 그때 번 돈으로 밥이나 맛있는 걸로 먹고 다니는 편이 훨씬 가성비 있는 선택이다. 그땐 그게 내 절절한 사랑인 줄 알았다. 이제는 안다. 그냥 자존심이었다는 걸.


출처: 네이버 영화


주인공 소피와 줄리앙은 반대인 것 같다. 자존심만 빡빡 내세우다가 사랑을 놓치는 수많은 케이스들 중 하나다. 폴란드인 소피는 폴란드인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한다. 괴롭힘을 당하던 소피에게 다가온 줄리앙. 소피를 위로하며 회전목마 장난감 상자를 건넨다. 가끔 빌려달라는 말과 함께. 하지만 소피, 줬다 뺏는 건 안 된다며, 내기할래? 라고 묻는다. 여기서부터 이들의 내기 지옥이 열린다.


장난감상자를 굴리며 "내기할래?"라고 하면 거부권 없이 내기가 시작된다. 별별 짓을 다 한다. 오줌싸기, 웨딩케이크 망치기, 굳이 나열하기에는 너무 많다. 영화 자체가 대책없는 내기로 이루어진다. 어린 시절 내기가 말초적인 것들이었다면, 성인이 되어서는 조금 더 자극적이게 된다.


문제는, 자동차 위에서 키스하기 내기다. 그동안 내기나 하던 꼬마애 같았던 줄리앙이 갑자기 남자로 보이는 매직. 소피는 사랑해달라고 한다. 그 말에 그러겠다고 대답하는 줄리앙. 소피는 눈치챈다. 이것도 내기냐고. 그리고는 버스를 타고 가버린다. 진심으로 한 말에 장난으로 대꾸한 줄리앙에게 화가 난 소피는 줄리앙의 사과도 안 받아준다. 사과를 하는 편이 더 기분 나쁠 것 같다. 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진지하게 말하는데 장난쳐서 미안하단 건지, 너를 진심으로 좋아하지 않아서 미안하다는 건지.


줄리앙의 아버지는 폴란드인이랑 노닥거릴 시간에 공부나 하라고 다그친다. 소피가 줄리앙에게 사과하러(소피도 대체 뭘 사과할 건지) 찾아갔지만, 줄리앙은 1년간 안 만나는 걸로 내기를 건다. 그렇게 시간은 4년이 흐른다.


이들은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다시 만난다. 와인 한 잔씩 하면서, 아주 로맨틱한 분위기. 줄리앙은 반지를 내민다. 소피는 감격한다. "내 결혼식 증인이 되어주어서 고마워." 한 대 패고 싶은 줄리앙. 소피는 기어이 줄리앙의 결혼식을 망친다. "이 남자는 제 약혼자예요." 그놈의 자존심들.


화가 난 줄리앙은 소피를 데리고 기찻길로 간다. 소피의 눈을 가려놓고 기찻길 한가운데 세워놓는다. 기차가 다가오는 소리에 겁이 난 소피가 그만하라고 말해달라 하지만, 줄리앙은 그러지 않고 가버린다. 소피는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을 만들어놓고 구해주지도 않은 줄리앙에게 10년간 보지 말자고 내기를 한다. 


소피는 돈 잘벌고 다정한 축구선수와 결혼해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줄리앙도 한 가정의 가장으로 안정적인 삶을 산다. 줄리앙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권태감은 현대의 밥벌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법한 것들이다. 이게 아닌데, 내 인생이 이게 아닌데. 그때 줄리앙의 집으로 날아온 택배. 바로 회전목마 장난감이다.


아주 그냥 난리다. 바나나 쉐이크보다, 스타워즈보다, 마리화나보다, 마릴린 먼로보다, 아놀츠 슈와제네거의 근육보다, 섹스보다, 야동보다 좋다는 내기. 줄리앙과 소피는 극적으로 만난다. 그리고 '개미 먹기, 백수 약올리기, 미친듯이 사랑하기'라는 새로운 내기. 그들의 머리 위로 시멘트가 부어진다. 


*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에 손꼽히는 영화다. 좋아함의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그냥 제목도 좋고 배우도 좋고 영상도 좋다. 결말을 좋다고 말하기는 애매하다. 결말이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노인이 된 그들의 모습이 나오긴 하는데 시멘트 속에서 굳어버렸는지, 탈출을 했는지 모르겠다. 시멘트 속에서 굳어버리는 것도 좋고 탈출을 해서 노인이 될 때까지 평생 내기를 하며 사는 것도 좋겠다. 각자의 가정이 무너졌겠지만 그저 영화니까, 하고 소피와 줄리앙에게만 집중해본다.


'내기하자'는 말이 사실 '사랑해'와 이음동의어가 아니었을까. 사랑한다고 끝없이 외쳤지만 돌고 돌아서 겨우 자기 자리를 찾은 어설프고 어린 연인들의 이야기로 읽혔다. 


우리는 '사랑해'라는 말을 얼마나 많은 단어로 대체하고 있을까. 밥 좀 챙겨 먹고 다니라는 말도 사랑해의 이음동의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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